◈날마다 십자가를 보라 눅9:23 05.03.20. 옥한흠 목사님 설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9:23
▲생각해 볼수록 신비한 십자가의 도
나는 35년 이상, 신학과 성경을 공부하고, 목회를 통해 십자가를 가르치면서 일평생
살아왔지만, 지금 나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면 <나는 아직 십자가를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실 수 있었는지...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신학적으로 해설을 할 수는 있겠지만
나의 좁은 지성과 얄팍한 깨달음으로는 그 신비와 깊이를 도무지 깨닫지 못 하겠다.
이것이 일생을 목회에 몸담고 살아온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천국 가서, 십자가를 생각하면, 더 어리벙벙해질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의 황홀한 영광이 오죽하랴.
그 때는 십자가에 대해 더 어리벙벙해질지도 모른다. 왜?
만왕의 왕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위대한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우리가 <목격>하게 될 것이다.
천군천사와 24장로들과 모든 거룩한 성도들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
하늘과 땅을 진동하는 찬송소리 가운데 계신다. 그 영광을 <체험>할 때,
그토록 높으시고 영광스러우신 주님이 왜 낮고 낮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상상이 가능한가?
저 높으신 분이 나를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그 감격,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없었다’ 쪽이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천국 가서 더 어리벙벙해 질 것이다.
이 땅에서도, 예수를 아무리 오래 믿어도, 십자가를 묵상할수록, 깨닫기 어렵다.
▲십자가를 잊지 말고 살아라
미국에서는 죄수를 사형 시킬 때 전기의자를 쓴다.
그런 사형틀 전기의자를 조그맣게 모형으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교수형에 쓰는 밧줄을 조그맣게 만들어 금박을 입혀서 벽에 장식하는 사람도 없다.
총살형에 쓰는 집행대를 사진 찍어서 명함의 로고로 사용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끔찍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대교인들은 다윗의 별(이스라엘 국기)을 상징으로 삼고
회교는 초승달로 상징을 삼고
불교는 연꽃을 상징으로 삼는다.
모두 기분 좋은 상징물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형도구를
목에 매고 다니고, 벽에 걸어놓고, 명함에 찍어 다니고, 교회 꼭대기에 세운다.
왜 그럴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늘 잊지 말고 마음에 새기면서, 체험하고, 느끼며 살아라>는 뜻이다.
존귀하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만큼
감동적이고, 충격을 주고, 눈물이 나게 하며, 내 가슴을 뜨겁게 하고
내 삶을 바꾸어버리고, 내 생각을 뒤집어 놓는 사건은 없다.
그것만큼 나를 진하게 감동시키는 사실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는가.
▲내 어머니의 사랑
내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옥목사, 나는 너를 낳아놓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너는 젖 달라고 보채는데, 나는 먹은 것이 없어서 젖은 안 나오고, 배는 고프고
그래서 나는 너를 낳고 나서 너무 많이 울었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나를 키우느라고 고생 많이 하신 것을 안다.
그러나 다른 고생은 다 잊어버렸지만, 단 한 가지 사실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데
어린 핏덩이 낳아놓고, 먹을 것이 없으니까 배는 고프고, 젖은 안 나오고,
애는 바동거리고, 너무 비참해서 울고 계신 어머니 모습.... 나는 잊을 수 없다.
그것만큼 나를 진하게 감동시키는 사랑이 없다. 그래서 내 마음에 계속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바동거리시며 고통을 참으신 것은.....진하게 나를 감동시키며, 잊을 수 없는 사랑이다.
▲현대 교회의 특징은 십자가 없는 복음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메시지를 사람들은 좋아한다.
미국 어떤 교회는 <고난주간>을 지나간 사건으로 치부해서 폐지해 버렸다고 한다.
부활절만 요란하게 지킨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만큼 천박해진다.
십자가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영원한 것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
일시적인 것에 더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십자가를 흐릿하게 보는 눈으로 신앙생활 하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의 타락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오늘 현대 교회가 이런 위기를 만나고 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십자가에 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 분의 십자가를
내 마음의 중심에 놓고, 날마다 그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고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가까이 가서 보는 것이고
그 보는 데서 오는 놀라운 은혜를 유지하고 사는 것이다.
그 십자가에서 오는 은혜와 능력을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세상을 사는 힘을 얻는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든가. 하루하루의 삶이 마치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다.
이것은 살기 좋다는 강남(성도들의 주 거주지)에 사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성공한 사람도 세상이 허무한 이유
세상적으로 꽤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분들도 예외 없이 힘들게 산다.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더 쫓고 쫓기는 경쟁 사회의 피곤에서 단 하루도 벗어날 수 없다.
세상적으로 안정된 사람들, 가질 만큼 가진 분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누려보았지만.... 너무 허무하다는 사실이다.
그 허무함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해외 여행 - 한 두 번 다니면 좋다.
그러나 일년에 대여섯 번씩 5년만 계속 다녀 보면,
더 이상 볼 것도 없고, 신기한 것도 없고, 다닐 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만족이 없고,
먹는 것은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 성공했다는 사람도
세상 살기가 힘들고 고달프다는 데는 모두 똑같이 동의한다.
▲서민층도 당연히 세상이 고달프고 허무하다
서민층이 사는 것이 어렵고 고달픈 것은 당연하다.
남편 벌이가 시원찮으면 주부들이 팔을 걷고 나서서
한 시간에 3천8백원, 하루 3만8천원 벌려고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다.
한 달 죽으라고 일하면 백만 원 남짓 번다. 얼마나 피곤한 삶인가?
무능한 자신을 탓하며
남보다 앞서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그래서 부자나 서민이나 모두 세상을 사는 데는 어떤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힘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데서 나온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그 사랑을 내 마음에 체험할 때, 세상을 살 “힘”이 생긴다.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
절대 기죽지 않게 하는 힘
털썩 주저앉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다시 붙들어 일으켜 세워주는 힘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며 감사할 수 있게 만드는 힘
이런 힘이, 세상을 사는데, 필요하다.
▲십자가에서 세상 사는 힘을 얻는다 ← 그 사랑을 깨달으면
나는 경쟁에도 뒤쳐지고 쓸모없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다;
나는 네가 얼마나 좋은지...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었단다.
그 사실을 잊어버렸니?
내 사랑에 만족하지 못 하겠니?
내가 이만큼 너를 사랑해주는 것만큼으로는 - 행복하지 않니?
행복하다는 말 못하겠니?
너 인생의 짐이 무겁다고 투덜거리는데
나는 너보다 더 무거운 짐 지고 십자가를 참았는데...
조금만 더 인내로 참아보렴
장차 하늘의 영광은 세상과 비교가 안 돼....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소중하게 보시는구나...를 깨달으면
나는 절대 시시하게 인생을 살 수 없다...
비록 가난하더라도(병들더라도, 실패했더라도) 나는 소중한 존재야!
이렇게 세상사는 힘이 부쩍 부쩍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자의식을 회복하고서 독수리같은 새 힘을 공급받는다.
▲살아있는 순교자 안이숙 사모의 간증
감옥에서 수 년 지내면서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영위한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
고문과 영양실조가 겹쳐서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손톱이 다 빠지고
추운 겨울 평양 감옥에서 난방도 없이 떨고 지내니 몸이 다 쪼그라들고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그 믿음이 백합처럼 향기롭게 피어서 감옥의 다른 사람들까지 감동시켰을까?
나는 그 비결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 분의 간증 테이프를 귀기우려 듣고 연구했다.
여러분 저는 감옥에서 배가 많이 고팠지만, 한 번도 배고프다고 울어본 적 없었습니다.
혹독한 겨울 추위에 감옥에서 밤새 오돌오돌 떨었지만, 춥다고 울어본 적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
그 사실을 생각하면.... 나는 감옥에서 계속 울었습니다.
그런데 여름에는 눈물을 흘려도 괜찮았지만, 추운 겨울에 눈물을 흘리니까
그만 눈 주변이 얼어붙어서, 나중에는 헐어서 눈물이 진물과 엉켰습니다.
그래서 눈 가에 늘 뭐가 더덕더덕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면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깨달았다.
그 형무소의 모진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이 -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왔구나.
안이숙 사모를 저렇게 위대하게 만든 원동력이 - 바로 십자가의 은혜였구나!
(그런데 나는 뭐냐? ←겸손한 비교)
이렇게 십자가는 험한 세상을 살 수 있는 힘을 나에게 준다.
◐2. 거룩하게 사는 힘을 얻는다
▲성화란?
주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로 나의 ‘의화’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아직 ‘성화’는 완성되지 못해서, 주님이 내 안에서 여전히 역사하신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성도가 죄를 범해도, 율법의 종으로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죄를 범한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믿기 이전에 범하는 죄와, 믿은 후에 죄는 차원이 틀린다.
우리가 죄를 짐짓 범한 즉, 빨리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치 않겠다고
노력하는 것 -- 이것이 “성화”의 삶이다.
▲어떻게 하면 성화의 삶을 사는가?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뢰밭과 같다. 거룩하게 사는 것은 무척 어렵다.
무슨 힘으로 거룩하게 사는가? 백 번 결심해도 또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무서운 악습에 사로잡혀 그가 이끄는 데로 끌려 다닌다.
어떻게 죄를 이기고 성화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거룩한 힘’을 얻어야 한다. 그 힘은
하루 십분만 조용히 십자가를 묵상해 보라! 거기서 생긴다.
나의 정과 욕심이 이미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 박혔다는 사실을 묵상하라.
그 십자가 묵상에서 거룩한 힘이 나오고, 그것으로 세상의 유혹을 이긴다.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성령의 역사로 ‘거룩한 힘’이 생긴다.
묵상을 통해, 거룩한 예수님을 내 곁에 모시면, 내 속에 충만하면,
죄의 유혹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힘이 흘러넘친다.
◑3. 희생하며 사는 힘을 얻는다
▲희생 없이 선한 역사가 꽃을 피우는 경우는 없다.
선진국이 법과 질서가 잘 지켜지는 선진 사회를 이루었다면, 과거에 그들의 선조들이,
지금 후손들이 이해할 수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과거에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가난한 민족이
지금 자가용을 가진 마이카 시대를 구가할 만큼 발전한 것은
이 일을 위해 누군가 엄청난 큰 희생을 치루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 우리나라는 독재 정권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는데
지금 민주화가 이만큼 꽃필 수 있는 기초를 누군가 놓았다면
그 누군가가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희생 없이 어떤 선한 역사가 꽃을 피우는 경우는 없다.
▲하물며 세상 나라의 법칙도 그렇거든
하나님 나라는 더욱이 희생 없이는 안 된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땀과 희생 없이, 부흥을 기대할 수 없다.
심지어 성경은 성도의 눈물, 피, 생명까지 헌신을 요구한다.
본회퍼는, “예수님이 그의 제자를 부르신 것은 죽으라고 불렀다”고 했다.
누가 가장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제자인가?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는 제자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구절엔 비록 <십자가>라는 말이 빠져 있지만
심오한 <십자가의 원리>를 담고 있다. → 희생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희생 없이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는 것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희생은 신앙생활의 기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 이런 <대위임령>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거는 <희생>하는 사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대 계명>도
내가 <희생>하는 것 없이는..... 흉내도 낼 수 없다.
이와 같이 희생은 신앙생활의 기초가 된다.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생활을 이루는데 절대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치관은 우리 주변에서 거의 실종되어 버렸다.
▲정치 지도자에 <희생>이 없으면, 그 나라의 현재와 장래는 매우 암울하다.
제3세계가 열악한 것은, 지도자들에게 <희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패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축복은 희생하라고 주신 것>이다.
희생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우글우글한 사회,
희생하는 것을 바보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사회,
→ 정신 사회가 병들었다는 증거이다.
→ 한국 기독교가 올바른 국민정신을 심지 못했다는 뼈아픈 반성이 필요하다.
▲급격히 감소하는 출산율
자녀 없이 결혼 생활하는 기혼 여성들이 점점 늘고 있다.
어느 설문 조사에 의하면, 자녀 없이 사는 기혼여성들 중 22%가
앞으로도 고의적으로 자녀를 갖지 않겠다고 한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15년 후에, 초등학생 1명당 노인 3명꼴의 고령화 사회가 된다.
여성들이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이유는 <자기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란다.
희생하기 싫어하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려고 발버둥치면 - 건강한 인격이 될 수 없다.
정신적으로 병들어 버린다.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정신병원에 들어오는 사람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은데. 나의 의사 경력 중에,
자녀를 다섯 이상 낳아서 키운 사람이 정신병원에 찾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애 여럿 낳아서 뒷바라지(희생)하느라 바쁜 사람은, 정신병에 걸릴 여유가 없었던 것.
희생하기 싫고 자기만을 위해 살겠다는 여자는 나중에 멍~하니 우울증에 걸린다.
▲전방위 희생, 전방위 해산의 수고의 예
어떤 교인(A)이 환자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매일 병원을 찾아가 위로했다.
한 번 찾아가면 두 시간 이상 앉아서, 기도해주고, 격려하며 전도했다.
그렇게 하기를 <3개월 동안> 끊임없이 계속했다.
이 환자가 퇴원을 했지만, 여전히 거동이 불편해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교회 호스피스 집사님 한 분(B)이 <2년 동안> 매주 하루씩 그 집을 방문해서
수족이 불편한 환자를 위해 기도해주고, 밥해주고, 청소해주고, 장 봐 놓고...
전방위 해산의 수고, 전방위 희생을 다했다.
이런 아낌없는 희생을 보고 그 환자의 남편은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환자는 물론이요, 그 남편까지 예수를 영접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 십 분간만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주님을 바라보자.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의 눈으로 우러러 보자.
그러면 나도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처럼 <희생할 수 있는 힘>이 내 속에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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