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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리더십

섬기는 위치에 머물수록 자기 관리에 철저하라

by 꿈꾸는 나무의자 2008.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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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조봉희 목사 _ 목동 지구촌교회 

피아노의 대가 루빈슈타인은 평소 여행할 때 소리 나지 않는 작은 피아노 건반을 들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차 안에서도 틈만 나면 벙어리 피아노로 연습하는 그를 지켜보던 제자가 다소 퉁명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피아노의 대가답지 않게 뭐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성공의 자리를 지키려면 그만큼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세계적 경영학자 피터 F. 드러커가 쓴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강조점은 간단하다. 인생의 프로가 되려면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교도의 대지도자 리처드 백스터도 이런 말을 했다.
남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공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그것이 결핍되지 않도록 하라. 남들에게는 멸망을 경계하라고 경고하면서 자신은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남들에게는 밥상을 차려 주면서 자신은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남들에게 밥 먹듯이 타이르며 하는, 믿으라는 말을 자신도 그대로 믿으라. 남들에게 전하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자신이 먼저 다정하게 모셔 들이라. 나는 내 삶을 말씀에 비추어 보지 않고 그냥 연구한 것만으로 강단에 서는 것이 목사인 자신과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체험했다. 하나님은 나를 목사로 부르시기 전에 제자로 부르셨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내가 무슨 설교를 해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영향력을 펼치기 전에 자신의 내면을 보라
분주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 지도자들이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가슴 깊은 교훈이다. 더구나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닌, 섬기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리더라면 자신의 영성을 얼마나 성실하게 관리해야 할지 각성시켜주는 가르침이다.
세계적인 여론조사 전문기관의 창설자 조지 갤럽(George Gallop)은 “20세기가 인간 밖에 존재하는 공간에 집착하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인간 안의 공간에도 관심을 보이는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이것이 곧 21세기 영성의 중심주제다. 21세기는 본질 회복을 추구하는 시대로 회귀되었고, 리더일수록 자신의 내면 가꾸기와 영성 향상에 더욱 충실해야만 영향력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본래 리더라는 말이 라틴어로 리단(lithan)인데 ‘앞서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리더는 누구보다도 성실한 자기 관리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자기 성찰을 최우선해야 한다. 리더십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리더십도 리더십의 일부이다. 어쩌면 자기 리더십(self-leadership)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리더십보다도 더 본질적일 수 있다.
자기 관리나 경영이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영향력을 미치는 리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승리한 사람만이 대인관계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그래서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이라는 새로운 책에서 자기 리더십이 확고한 사람일수록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자라고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을 섬기는 리더다
오늘 우리가 성령님으로부터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가 무엇일까? 섬기는 위치에서 사역해야 하는 우리는 군림하는 권력형 보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을 섬기는 리더로 부름 받은 종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위치는 섬기는 자리에 있다. 존 맥스웰은 리더십 강의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건강한 리더는 섬기고 씻어주는 타월(towel)에 관심이 있고, 건강하지 못한 리더일수록 자기를 내세우는 타이틀(title)에 치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더 이상 권위주의 시대가 아니다. 그 동안은 계급과 권위가 중점을 이루었으나, 21세기는 서비스업의 시대로 바뀌었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도 같은 얘기를 한다. 20세기가 제조업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서비스업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세상도 지배자를 요구하지 않고, 섬기는 자를 필요로 한다.
일찍이 매튜 헨리라는 영국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Master(다스리는 자)가 되지 말고, Minister(섬기는 자)가 되라.” 덴버신학교 영성 신학자 브루스 디마레스트(Bruce Demarest)가 정의해주듯이 기독교 영성이 추구하는 바는 우리의 내적 인격과 외적 행위를 성령님의 도우심과 협력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조금씩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으로 점진적으로 닮아가는 것이다.
 

섬기는 리더의 자기 영성 관리 방법
이처럼 ‘섬기는 위치에 있는 리더는 자신의 영성을 어떻게 유지하는가?’라는 주제에 따라 나의 소박한 영성 관리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초심의 영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본다. 리더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체성 확립이 필요한데, 그것은 곧 소명의 은혜를 아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다. 신학생 시절에 읽은 책의 제목이 지금도 여전히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하나님의 고귀한 소명』(The High Calling of God).
소명감의 영성을 유지할수록 일평생 초지일관 섬김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섬기는 지도자의 표상적 모델인 사도 바울이 표명하듯이 나는 누구로부터 왜, 무엇을 하라고 부름 받았는지를 점검해볼수록 행복하게 사역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여전히 미달 목회 사역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일을 즐긴다. 소명과 사명의 영성에 따라 목회를 하면 할수록 즐겁고 행복하다.
 둘째, 성육신의 리더십 원리를 따르고자 한다.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여러 가지 사역을 설명해 준 후, 그분의 사역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유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인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곧 성육신의 리더십이다. 테레사 수녀의 한마디 말은 오늘도 내 가슴을 숙연하게 한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교인들의 현실과 아픔을 공감하며,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다 보면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다. 교인들과 모든 애환을 함께 나누는 리더십의 영성을 유지하고 싶다.
 셋째,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만족하는 영성 유지다. 여호수아는 스승 모세가 죽을 때까지 ‘모세의 시종’이라고 불려졌다. 이처럼 그는 초지일관 조연의 영성을 유지한 사람이다. 이것이 곧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 세례 요한의 영성이기도 하다.
나는 몇 년 전에 어떤 책을 읽다가 참 좋은 문장에 큰 감동을 받았다. 영어의 단순한 문장이다. “Second but better.”(두 번째가(지만) 더 좋을 수 있다.) 이것이 곧 빈 마음의 영성이다. 나는 종종 고독한 성자(solitary saint)로 섬김의 사역에 올인했던 모세를 칭찬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묵상하곤 한다. “내 종 모세를 내가 친히 안다.” 그렇다. 주님이 친히 알아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넷째, 성공적인 자기 경영의 영성을 유지하자. 훌륭한 지도자일수록 자기 훈련의 성공자다. 곧 자기 정복자다. 미국 국무장관이 된 조지 마셜은 국무부의 사기가 낮다는 말을 듣고 간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사병이라면 얼마든지 사기 문제에 빠질 수 있으나, 장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 국무부의 모든 장교는 자신의 사기를 자기 스스로 챙기십시오. 내 사기는 내가 챙깁니다.” 이것이 곧 셀프 리더십의 기본이다.
섬김의 위치에 있는 리더는 매순간 자기 경영에 성공해야 한다. 그야말로, 자기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소위 온도계(thermometer)가 아닌 온도조절 장치(thermostat)가 되어야 한다. 이런 건강한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날마다 성령의 다스림을 사모하고 목말라한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의 셀프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힘입어야만 초지일관 즐겁고 기쁘게 봉사하며 사역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섯째, 선지자적 영성보다는 제사장적 영성을 가슴에 품어 본다. 물론 영성에는 건강한 균형이 필요하다. 공의와 사랑, 선포와 설득, 머리와 가슴의 영성이다. 오늘날과 같은 고난의 시대에는 백성들의 애환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호소하며 절규해주는 제사장적 영성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따금 가슴 뜨끔한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현대 교회는 CEO만 있을 뿐, 참된 목자가 없다는 지적이다. 어느 순간부터 목회자들이 기업의 CEO 리더십을 잘못 흉내 내고 있다. 나부터도 그런 것 같다. 자신의 신분(position)보다 사람(people)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목회자 신분이 벼슬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오래 전 미국에서 D. Min 과정을 공부할 때, 설교학 시간에 강의를 듣다가 펑펑 울었던 적이 있다. 앤드류 보나르의 질문 앞에 가슴이 울컥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설교하기를 좋아하지만, 당신이 설교하는 사람들을 과연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그날부터 머리(head)가 아닌, 가슴(heart)의 설교를 하고자 애쓰고 있다. 영혼 사랑의 영성을 유지하고 싶다.
 여섯째, 선교 지향적 영성의 복을 누리고자 한다. 나는 교회 개척 초기에 존경하는 스승으로부터 참 좋은 영성관리 비결을 배웠다. 목회 사역을 하면서 선교지를 부지런히 다니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국내 농어촌 교회와 해외 선교지를 부지런히 다닌다. 또한 교회 부흥회와 신학교 수련회, 목회자 세미나에도 최선을 다해 섬긴다. 가서 섬기는 만큼 결과적으로 내 영혼이 생기를 얻고, 성령 충만함으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현장을 다녀오는 셈이다. 그러므로 모든 동역자들에게 적극 권장하고 싶다.
 일곱째, 극락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행복한 영성을 꿈꾼다. 어느 날 테레사가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한 어린아이의 고름을 만지며 치료하고 있을 때, 함께 살고 있던 한 분이 이런 질문은 던졌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이나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혹은 높은 자리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생기지 않나요? 당신은 이런 삶에 진정 만족하십니까?”
이 질문에 테레사는 유명한 대답을 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그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최고의 영성을 보여준다. 이것이 곧 자기가 섬기는 위치에서 오직 하나님한 분에게만 집중하고 초점을 맞추는 관상적 영성(contemplation)이다.

 

섬기는 리더였던 다윗은 자신의 영적 행복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개역한글, 시 43:4). 유진 피터슨은 이것을 “my exuberant God”이라고 번역한다. 하나님이 나의 최고의 기쁨이시라는 신앙고백이다. 그 어떤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의 가슴에 머무르며, 하나님 그분만으로 만족하는 행복한 영성이다. 누구든지 섬김의 위치에 머무를수록 극락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영적 극치를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 오직 하나님 그분만으로 만족하는 행복한 영성이다.
옥스퍼드의 사상가 C. S. 루이스는 이런 수준 높은 영성을 유지하도록 격려한다. “하나님 외에 다른 많은 것들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러기에 나도 섬기는 위치에서 극락의 하나님을 체험하며 사는 행복한 영성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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