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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신학/설교

하나님의 교회

by 꿈꾸는 나무의자 2008.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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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제철 목사
본문 : 고린도전서 1:1~3

하나님의 교회란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고 성경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공간, 건물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일뿐 건물 자체가 교회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구 기독교 사회가 2000년 동안 곳곳에 수많은 예배당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교인들은 없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서구 교회는 교회와 건물을 동일시 했습니다. 건물을 짓는 것이 교회의 목적인양 오해했었습니다. 따라서 도처에 건물은 섰지만 막상 중요한 그 속의 교회는 상실되고 만 것입니다.

교회는 조직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과 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결코 교회는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는 조직과 제도를 만들되 탈조직화와 비제도화를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직가 제도는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갖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모든 조직과 제도는 그 자체의 생명력에 의해서 본래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맙니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당장의 필요를 위해 조직과 제도를 만들지만 그 조직과 제도가 자체의 생명력에 의해 경직화, 고착화되지 않도록 언제든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탈조직화와 비제도화의 의미입니다.

칼빈의 교회개혁운동은 북유럽에서 이데올로기로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를 건전하고 바람직하게 건설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성경에서 찾아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인권, 복지, 환경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사람들의 조직이나 제도에 의해서 분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개혁을 배우기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와서 오랫동안 함께 기도했던 존 녹스는 교회를 교인들을 대표하는 대의정치, 장로제도라는 시스템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녹스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그 장로교회가 미국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장로교회가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한국의 장로교회가 미국의 장로교회에서 출발했지만 현재 미국의 장로교회는 더이상 우리와 같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기질상, 어떤 특정 인간이 교인들에 의해 선택된 후에 나이 70세가 될 때까지 같은 직분을 유지하고, 물러난 후에도 교회에서 행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미국 장로교회는 만 19세부터 만 90세 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일을 진행하는 직능시스템으로 바뀌었습니다.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대표자들이 들어와서 함께 교회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본산이라고 하는 제네바를 비롯한 유럽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은 장로교회 시스템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교회 시스템이 한국에 들어와 가부장적 유교문화와 접목되면서 독특한 한국만의 시스템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번 선출되면 70세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뿐아니라 70세 이후에도 원로가 되어서 죽을 때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 교회의 모든 분란의 원인은 종신직에 해당하는 장로(물론 목사도 포함됩니다.), 당회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100년 전에는 그 제도가 필요해서 받아들였지만 100년이 지나기까지 이 제도가 고착화되어서 성경에서 벗어난 자체의 조직 생리를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탈조직화, 비제도화를 시행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렇게 이미 시효를 상실한 100년 전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곳곳에서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근래에 들어 이와같은 던져버려야 할 제도를 과감하게 버리려는 시도가 교회 일각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교회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교회는 창립된지 1년 반이 되었습니다. 아마 1년 반 동안 많은 제도가 생겼을 것입니다. 많은 조직 부서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교회 초기에 어떤 제도와 조직을 만드는가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세월이 흘러가도 그 때의 조직과 제도가 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 설립 초기에 필요에 의해 조직과 제도를 만들지만, 그것은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폐지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탈조직화와 비제도화를 병행하지 않으면 지금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조직과 제도가 40년, 50년 후에 이곳에서 신앙 생활을 할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제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교회를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합니다. 바로 여러분들 각자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인 각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우리 각자가 어떤 사람이 될 때 참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381년 니페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교회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적인 교회, 사도적인 교회이다.'
바로 이 교회에 대한 정리는 그로부터 1600년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첫째, 교회가 하나이어야 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수가 하나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첫 번째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이어야 한다는 뜻은 그 숫자가 하나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종파나 교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81년 교회에 대한 정리 이후, 교회는 동·서교회로 분열되었고,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개신교가 분리되고 다 알 수도 없는 수많은 교파들이 생겼습니다. 왜 수없이 많은 교단과 교파가 존재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가 끝난 후에 제가 여러분에게 백지를 나누어드리고 오늘 예배를 묘사해보라고 한다면 백 명이면 백 가지의 묘사가 나올 것입니다. 조작되거나 베껴쓰지 않는 한 여러분의 인격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 대한 묘사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오늘 이 예배를 묘사하고 있다는, 본질적인 내용은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참석하지 못한 어떤 사람이 오늘 예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묘사 보다는 여러분 전체의 묘사를 다 거두어서 본다면 전체적, 입체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의 복음서가 아닌 네 개의 복음서를 주신 까닭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서 기자들에게 성경을 쓰게 하셨지만 그들을 로보트와 같이 사용하셔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말씀을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세리 마태의 인격, 부잣집 아들로서 한 때 철없이 지냈던 마가라는 청년의 인격과 정서, 과학도요 의사로서 매사에 철저했던 누가의 인격과 삶의 경륜, 그리고 90세가 되기까지 마리아를 봉양하면서 깊은 통찰력을 지녔던 노인 요한의 인격을 도구로 쓰셨습니다. 그래서 사 복음서의 내용은 똑같지 않고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각 다른 인격자에 의해서 각각 다르게 쓰여진 네 개의 복음서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만약에 누군가 이 땅 하나의 교파만 존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험한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같지만 그 복음에 접근하는 방법과 그 복음을 강조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도 있고, 개신교도 있고, 감리교, 성결교.. 등이 있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신에게 더 필요한 부분을 강조하다가 생겨난 교단과 교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두 가지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들교회 교인으로, 교회로 모여있지만 우리들교회 역시 불완전한 교회라는 겸손함을 새겨야 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함께 모여 이룬 교회치고 이 세상 어떤 교회도 완전한 교회일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한 교회임을 겸손하게 고백할 때 이 교회의 주인 되시는 완전하신 '주님의 완전하심'으로 우리의 부족함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완전하다고 착각한다면, 장님이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져보고 그것을 코끼리의 전체로 생각하듯이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새겨야 할 것은 다른 모든 교회와도 본질적으로 하나여야 한다는 교회의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서 타교회의 교리에 대해서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우리들교회가 어떤 교단에 속해있든, 어떤 교리를 갖고 있든 타교파와 타교리에 대해서 열려있을 때 상호보완작용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교회로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둘째,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하지 않은 교회는 교회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게 됩니다.
거룩은 우리가 거룩해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형편없는 죄인 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구별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의무를 갖게 되었습니다. 거룩은 외적 형식과 행태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거룩은 구별된 생각과 삶으로 부터 비롯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신 구원자(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개의 새끼는 언제나 개입니다. 사람의 자식은 언제나 사람이죠. 베드로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그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실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그 고백이 어디에서 이루어졌습니까. 그곳은 가이샤라 빌립보였습니다.
가이샬 빌립보는 분봉왕 헤롯 빌립이 건설한 큰 도시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의 칭호 '가이샤'가 붙은 도시가 여럿 있었는데 아무 곳에나 붙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칭호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어야 했고 그 도시의 중심에 황제를 경배하는 신전이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황제는 지상의 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산유곡, 허허벌판에서 '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에서 물으셨습니다. 그 도시에서 남루한 나사렛 예수께서 물으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당신이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전에 앉아서 인간으로부터 경배받는 로마 황제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지같은 몰골일망정 나사렛 예수, 당신만이 구원자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 세계를 압도하는 황제의 논리를 따라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 자체를 삶의 목적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Logos(말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 그 길을 내 생의 목적으로 삼겠다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고백의 삶을 위해 여러분은 이 자리에 우리들교회로 모여있습니다.

거룩은 성가를 거룩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있지 않고, 설교를 경청하는 여러분의 태도에 있지 않습니다. 예배당을 나가서 삶의 터전, 세상 속에서 진리의 논리를 좇아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 속에 있습니다. 사 복음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복음 21장에서 요한은 갈릴리 바다의 이름을 '디베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베랴'라는 이름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 이름을 가진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주님 오시기 전까지 앞으로 1000년 후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은 황제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곳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좇아 살아야 할 세상은 허허벌판, 산속이 아니라 황제의 논리가 판을 치는 이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우리들교회가 거룩한 교회인가 아닌가는 예배당에서 판가름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각자가 이 세상 속에서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주인으로 삼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셋째, 교회는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카톨릭(catholic: 보편적인, 전반적인) 교회이어야 합니다. 4세기 이후에 확정되었던 도신경 속에 '우리는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거룩한 공회가 가톨릭 교회입니다. 이 용어를 천주교회가 먼저 사용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개신교의 교회는 '유니버설-처치(universal-church)'라고 하고 천주교회는 '로만카톨릭-처치(Roman catholic-church)'라고 합니다. 어떻게 표현하든 그 뜻은 동일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차별없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만민을 위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에는 주인과 노예가 정복자와 정복당한 민족이 교회에서 한 지체로 어울려질 수 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이것은 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교회에 가 보십시오.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모입니다. 백인과 흑인이 한 데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는 의외로 적습니다. 보편적 교회가 아닙니다.

자기 교회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분들 중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을 많이 듣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수준있는 사람들만 모여.'
여러분, 그러면 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닙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모두 한 데 모여질 수 있는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 보편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먼저 보편적인 교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예전에 마포경찰서에 며칠 갇혀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감방에 살인을 저지른 한 청년이 잡혀 들어와서 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청년은 동네 사람과 술을 먹고 고스톱을 치다가 싸움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코끼리같이 우람한 상대에게 맞으면서 내가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과일을 깎아먹던 과도가 눈에 띄었고 엉겁결에 그 칼을 집어서 자신을 덥치는 사람을 찌르고 만 것입니다. 전혀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찔린 사람이 즉사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그 청년이 놀랐는지 신발도 신지 못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마포에서 강남터미널까지 뛰어갔습니다. 거기에서 제일 먼저 출발하는 버스를 탔습니다. 김제에 가는 버스였습니다. 김제에 도착해서 만에 하나라도 자기에게 찔린 사람이 살아있기를 바라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아내의 대답은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두려워진 청년은 자살을 결심하고 약방을 돌아다니면서 수면제를 사모았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포장마차에 앉아서 소주를 한 잔 마셨습니다. 마침 그 날이 추운 겨울 수요일 밤이었고 시골 조그만 예배당으로부터 예배시간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렸습니다. 갑자기 청년은 죽기 전에 교회라도 한 번 가서 기도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술에 취한 채 예배당에 들어가서 빈자리에 앉았습니다. 술 냄새가 풍기는 그를 향해 옆에 있던 교인이 눈을 흘깁니다. 앞 사람이 돌아보면서 반갑지 않은 표정을 합니다. 부담스러워진 청년은 사방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은 빈자리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시작되자 전도사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쫓아내겠다는 표정입니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서 그 자리를 나와버렸습니다. 다시 소주를 한 병 산 후에 여관에 가서 소주와 함께 수면제를 먹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살아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가 살펴보니까 수많은 약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양의 수면제를 구했는데 술에 너무 취해서 약을 한 알밖에 안 먹었습니다. 그후 아내의 권유로 자수를 하고 제가 갇혀있던 감방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청년이 살았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그날 김제의 여관에서 죽었다고 가정해 봅시니다.
그 날 그 예배당에서 그 청년의 주위에 앉아있던 교인들, 한 청년이 자신의 생을 끊기 위해 마지막 순간 그 교회를 찾았는데 이 청년을 반기기는 커녕 쫓아냈습니다. 만약 그 청년이 죽었다면 그 주위에 있던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책임을 물으셨을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모이지 않습니다. 이 순간에 술냄새를 풍기면서 누군가가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지탄을 받는 독재자, 파렴치범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을 품어주는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그 모두를 품어줄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들교회가 일년 반밖에 안 됐어도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모인 것을 보면 여러분 대부분이 초신자는 아닐 것입니다. 이전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온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서 이 교회에 오셨다면 조만간에 또 이 교회를 떠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보편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곳에 와서 현재있는 분들, 앞으로 올 어떤 분들과도 한 데 어울리는 보편적인 교회가 된다면 여러분의 방황은 끝나고, 이 교회가 여러분 생의 마지막 은혜로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2000년전 세계의 역사를 새롭게 하실 때 예루살렘 모교회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다른 교회를 당신의 도구로 쓰지도 않으셨습니다. 조그마한 안디옥 교회를 세계 역사를 새롭게 하는 당신의 첨병으로 쓰셨습니다. 지금도 안디옥에 가면 2000년전 초대교회 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숨어서 예배 드리던 좁디 좁은 동굴이 남아있습니다. 몇 십 명도 채 수용할 수 없는 그 작은 교회가 로마 제국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도행전 13장 1절 말씀은 안디옥 교회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이 명단은 요즘 교회로 표현하면 안디옥 교회의 당회원 또는 운영위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 바나바는 레위인, 정통파 유대인이었습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있는데 '니게르'는 검다는 뜻을 가진 '니그로(Negro)'의 어원으로 흑인 노예였습니다. 구레네(지금의 리비아) 사람 루기오는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여겼던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네 번째 인물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헤롯 왕의 친동생 혹은 죽마고우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로마 제국에 붙어사는 불의한 집권 세력 출신으로 당시에는 최대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인물은 바울로 개명되기 전에 예수님을 대적하여 핍박한 사울이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라서 한 자리에 앉는다는 자체가 불가능해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동질성 회복, 보편적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를 들어 로마 제국의 역사를 새롭게 하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힘은 모이는 사람의 머릿수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보편성입니다. 얼마나 나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가, 그 사람들이, 그 교회들이 언제나 역사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2000년전이나 오늘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넷째, 교회는 사도적 교회이어야 합니다.
사도적 교회이어야 한다는 뜻은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말씀의 터 위에 있는 교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말씀을 터전으로 삼아 내가 나를 바로 세워갈 때, 바로 내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사도적 교회로 성숙해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교회는 휘문고등학교 강당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으로 손을 들어보십시오. 성경을 한 번이라도 통독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이 질문에 마음 속으로 손을 들 수 없다면 어떻게 여러분들이 참된 교인으로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손을 들 수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집착하고 있는 것은 황제의 논리가 아닙니까. 그 황제의 논리를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고자 함이 아닙니까. 내가 말씀 위에 서지 않고는, 말씀 앞에서 나를 부인해가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교회가 진정으로 이 시대를 밝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 각자가 말씀의 터 위에 서야 합니다. 주일날 목사님을 통해 선포되는 설교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에만 여러분은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을 통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터전인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가리켜서 가지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교회는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각자 가지로 붙어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나무를 생각해 봅시다. 땅에서 순이 돋고, 줄기가 생성됩니다. 그 줄기에 첫 번째 가지가 나오고 시간이 가면 두 번째 가지가 나옵니다. 그러면 두 번째 가지가 첫 번째 가지 밑으로 내려갑니까. 위로 올라갑니까. 두 번째 가지는 첫 번째 가지의 위로 올라갑니다. 세 번째 가지는 두 번째 가지의 위로, 네 번째 가지는 세 번째 가지의 위로.... 언제나 제일 마지막에 나온 가지, 가장 연약한 가지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는데 작년에 제일 윗자리에 있던 가지가 여전히 제일 윗자리에 있다면 그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그 나무가 살아있다면 이듬해 봄에 또 다른 새 가지가 올라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가장 오래되고 강하다는 사람이 언제나 위로 올라갑니다. 만약 처음 나와서 제일 강하고 굵은 가지가 제일 윗자리에 있고, 그 아래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가지가 자리를 잡는다면 그 나무는 이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어떤 폭풍에서도 나무가 늠름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크고 강한 가지들이 밑에서 버텨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가지는 어떤 가지가 다른 가지를 위해서 밑가지가 되어줍니다. 그것이 건강한 나무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 너희는 가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교회가 시작될 때는 은혜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분란이 생깁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래 되고 스스로 크다고 생각되는 교인들이 윗자리를 차지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일년 반 만에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모일 정도로 은혜로운 우리들교회가 만약 언젠가 심각한 분란에 휩싸이게 된다면 그 원인 제공자는 2년, 3년 후에 등록한 교인이 아닐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들 때문에 교회는 분란에 빠질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가장 오래된 교인일수록, 직분이 높을수록, 첫날 예배드릴 때부터 참석한 교인일수록 밑가지가 되는 교회, 언제든지 오늘 새로 온 교인들이 마음껏 봉사하고, 마음껏 헌신할 수 있도록 밑가지가 되어줄 때 그 교회가 사도적인 교회요,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제도가 아닙니다.
우리들교회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하나의 교회가 되십시오.
거룩한 교회가 되십시오.
보편적인 교회가 되십시오.
사도적인 교회가 되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들어 이 시대를 밝히실 것입니다.

[기도]

주님, 도처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닐 교회가 없다고 한탄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당신의 종을 연단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하게 하셨다가 당신의 종을 들어 이곳에 우리들교회를 세워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원근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찾게 하시고 이 교회를 통해 위로받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깨달아 아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러나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모든 교회가 실은 이렇게 은혜롭게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요, 제도가 아니요, 각자 자신들임을 잊지 말게 도와주옵소서. 우리들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아닌가는 각자 자신의 삶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마음에 새기게 도와주옵소서. 모든 교우들이 하나의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적인 교회, 사도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 자신을 날마다 바로 새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이 교회를 통해 이 땅의 역사를 맑고 밝히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날마다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시대의 안디옥 교회가 되도록 은총 베풀어주시기를 간구드리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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