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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에의 메시지(스가랴8:1-23) 이동원목사

by 꿈꾸는 나무의자 2017.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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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회복에의 메시지
설교본문 : 스가랴  8:1 ~23
설    교 : 이동원 목사 (지구촌교회)


스가랴서 8장을 함께 같이 공부하시겠습니다.. 스가랴서 다 잊어버리지 않으셨어요? 찾는데 어려움을 느끼는걸 보니까 스가랴서를 보신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자, 스가랴서는 4개의 커다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서론이고 1장 1절부터 8절까지, 나머지 부분은 두번째, 스가랴서의 두번째 부분은 뭐라 그랬습니까? 8가지 환상, 8가지 환상으로 두번째 부분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부분은 뭐예요. 두개의 메시지. 그게 7장과 8장이죠. 7장과 8장이 두개의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고, 9장부터 마지막 장까지가  두개의 예언, 혹은 신탁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두개의 예언, 혹은 신탁. 두개의 메시지, 세번째 구조에서 첫번째 부분인 7장은 뭐에 대한 메시지 였습니까? 금식에 대한 메시지였고, 8장은 오늘 함께 공부할 8장은 회복에 대한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회복에 대한 메시지. 우리가 이 8장을 보면 8장에 열번씩 반복되는 중요한 문구가 있습니다. 우리가 8장을 풀어가는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8장 2절 우리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8장 2절. 다 같이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8장 2절이 무슨 말로 시작이 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3절도 무엇으로 시작되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4절도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또 6절도 어떻게 시작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또 7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9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11절에는 말하노라가 아닌 말하노니 그러니 11절은 빼고, 왜냐하면 딱 떨어지는 문장이 아니예요. 14절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또 19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20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마지막 23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몇번 나와요. 10번 나와요. 10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의 그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과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 그 회복을 축복하고 있는 그 축복의 메시지. 축복의 약속입니다. 약속과 동시에 그러한 축복이 이루어져 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책임을 감당해 가야 할 것인가, 그 책임에 대한 격려가 10가지 메시지 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회복이라는 것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 그리고 예루살렘 도성의 회복에 그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도성이 회복된다. City가 회복된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이나 도시의 회복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가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비단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 회복뿐만이 아니라, 이것은 신약까지 연장되어서 모든 시대를 통한 신앙 공동체의 궁극적인 회복, 다시 말하면 신약에 있어서의 신앙 공동체의 회복인 교회의 회복까지도 바라보고 있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회복의 메시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이 스가랴 8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드는 이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 일수가 있는가 공동체의 이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꿈.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꿈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꿈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모아서 그들이 연결되게 하셨을 때 그 공동체를 향해서 하나님은 어떤 기대를 가지셨는가, 어떤 하나님의 꿈. God's Dream. 하나님이 어떤 꿈을 가지셨는가? 우리 편에서 볼 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꿈을 갖고, 그 공동체를 실현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라는 메시지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도 그 누구도 완전히 자기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때, 완전히 인간 가운데, 예수님 빼놓고, 아마도 완전히 내 꿈을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공동체도  그 공동체에 위탁된 꿈을 100% 완전히 실현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는 사실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완성 교향곡과 같은 것이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꿈이 없다면, 어떤 ideal이 없다면 이상이 없다면 Dream이 없다면 개인은 절대로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도 성숙해 갈수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꿈과 그리고 그 이상을 100% 성취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꿈이 없는 인생. 꿈이 없는 인생, vision이 없는 인생이라는 것은 앞으로 향해서 도무지 전진해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도 마찬가지고,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인생의 활력 인생을 움직이게 만드는 또 인생의 희열을 주는 것, 인생의 의미를 주는 것. 인생을 움직여 나가는 것. 인생을 성숙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열쇠, 삶의 요소가 있다면 저는 그럼 그걸 꿈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꿈, Vision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꿈이라는 말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동양사회는 상당히 소극적인 정의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동양권에서는 이 꿈이라는 것이 별로 좋은 의미로  쓰여지지 않았어요. 몽상 그래서 개꿈.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수 없는 어떤것들 헛된 어떤 것들. 이런 것들을 상징하는 언어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만 기독교 문화 영향을 받은 서구권에서는 꿈이라는 것은 매우 진취적이고 미래로 향한 그런 의지로 작용하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서양 사회가 동양 사회 앞지르고 많은 가치를 창조해 놓은 중요한 그 배경이 아니였는가라는 그 원인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실까요?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꿈을 갖는다는 것, vision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죠. 월트 디즈니, 유명한 월트 디즈니가 자기 딸이 한 5살쯤 되었을 때, 그 딸의 손을 잡고 공원에 갔다가, 그 공원이 아주 열약한 환경인 것을 보았습니다. 안전하지도 않고, 또 공원의 어린이 그 놀이기구도 엉성하고, 아이들이 당장 다칠 것만 같은, 그리고 엉성한 분위기의 그 공원을 보면서 월트 디즈니의 마음속에 물끄러미 자기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꿈이 하나가 있습니다. 정말 안전한 곳에서 마음껏 아이들이 미래를 향한 그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그런 놀이공원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것이 단순히 놀이 터일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연을 학습하고, 과학을 학습할 수 있는 그런 위대한 장이 될 수는 없을까? 갑자기 머릿속에서 꿈이 막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월트 디즈니가 자기 사랑하는 딸의 손을 잡고가서 그 열악한 공원 환경 속에서 보면서 그 자리에서 그 마음속에  움트고 있었던  꿈. Dream. Vision. 그것이 오늘날  전세계에 퍼진 놀이공원, 디즈니랜드라는, 디즈니 월드라든지, 에버랜드도 다 그것 때문에 생긴 거예요. 이 한 사람의 꿈 때문에. 
한 사람의 꿈 때문에 저는 언젠가 여러분들과 나누었습니다마는 요즘 저는 평신도 지도자 훈련을 하면서 그 얘기를 지속적으로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 하블이라는 사람이 신학생 시절에 20대 초반의 어린 신학생이 빌스킬이라는 신학교 교수가 가르치는 사도행전 강의를 들으면서 이 교수가 사도행전 2장에 초대교회 특성을 얘기하면서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는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 살아 움직이는 교회. 모든 교인들이 전도하던 교회. 나가서 불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 이 교수가 학생들에게 도전하기를 나는 아직 초대 교회 이후에 이 초대 교회를 닮은 아니 초대교회를 능가할 수 있는 사도행전적인 그 가장 위대한 교회는 아직 이 땅에 탄생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말하면서 학생들을 가리키면서  여러분 중 누군가가 바로 그런 교회를 building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어린 신학생 빌 하이블은 마음속에서 외쳤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도와주시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사도행전을 닮은 위대한 교회의 꿈이 탄생하고 있었던 순간이예요. 만약 그가 그 꿈을 꾸지 않았었더라면 오늘날 윌로우 크릭 같은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공동체가 어떤 꿈을 가져야 하느냐? 오늘 우리는 스가랴 8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서 만드는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가 될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기대를 가지셨느냐? 10가지 기대. 10가지 기대. 10가지 기대가 하나님의 10가지 선언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선언입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말속에 10가지 선언이 있습니다. 10가지 선언. 왜 하필이면 10가지를 선택하셨을까. 열이라는 숫자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수로 이해했습니다. 만수, 꽉 차 있는 수. 그렇잖아요. 옛날 뭐 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세대에는 손가락으로 다 셋는데 기꺼해야 세봐야 몇까지 셀 수가 있어요. 열이면 끝나요. 이게 만수예요. 만수. 그래서 아마 십계명도 나왔을지 모르죠. 십계명. 열 이상 세기 위해서는 발가락까지 동원해야 해요. 열은 만수 입니다. 만수. 열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기대를 요약했다도 할 수가 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 이것은 바로 잠시 후에 회복될 성전이 회복되고 도시가 회복되면서, 시온의 땅 예루살렘 안에 세워질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Dream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시대에서 믿음의 공동체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만드는 공동체가 어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하나님이 기대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만들고 있는 이 교회에 대한 기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되길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자, 몇 가지예요? 10가지.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아직 오늘 끝나기는 틀렸다. 10가지 하려면 얼마나 많이 지나 갈 것인가? 

첫째는 저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공동체다. 사랑의 대상으로써의 공동체. 1절과 2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 사랑의 대상으로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보고 너무 너무 사랑해서 견딜 수 없는 공동체. 사랑의 대상으로써의 공동체. 우리 다시 한번 1절과 2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시작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여기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왜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기대를 읽어낼 수가 있을까요. 무슨 단어가 사랑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단어가 있다면 어떤 단어가 있을까요. 질투입니다. 그렇죠. 사랑과 질투, 같은 단어라고 생각을 해요. 본래 사랑이라는 단어가 히브리, 아니 이 질투라는 단어가, 질투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키나(?), 키나(?). 라는 단어입니다. 키나, 다 같이 키나. 앞으로 남편을 질투할 일이 생기면 속으로 키나 그러십시오. 겉으론 하지 마시고. 키나. 질투. 이 단어를 히브리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 재미나는 것은 이것이 두가지 단어로 번역될 수가 있어요. 똑같은 단어를 가지고, 한 단어는 우리말의 번역처럼 질투라고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Jealous 라고 그렇죠. 영어로 jealous. Jealousness. Jealous. 이 jealous라는 단어와 비슷한 영어 단어가 하나 있어요. zeal, zeal 아주 비슷한 단어예요. zeal(?) 하나는 J로 시작하고 하나는 Z로 시작하고, zeal, jealous. zeal이라 하면 열정이라는 말입니다. 열정, 혹은 열심. 질투하고 열정. 펄펄 끓어 오르는 열정. 마찬가지 예요. 열정. 질투. 
어떤 여자가 남편이 바람이 들었는데, 전혀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둘 중의 하나일거예요. 하나는 성화가 완성된 성녀던가 그렇지 않으면 아주 돌아이던가. 머리가 어떻게 된 이상한 사람이던가, 인간이 아니던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질투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어떻게 질투 안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향해서 그들의 시선을 돌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어떻게 하실까요. 질투하십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예요. 이런 부분을 가지고 어떤 분이 하나님을 가지고 goship비슷한 언어를 썼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지나치게 인간적인 하나님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다. 저는 그걸 볼 때 하나도 이의를 달 것이 없더라구요. 맞아요. 하나님은 굉장히 인간적인 하나님이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닮아서 하나님이 인간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그건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런 것 뿐입니다. 그 차이예요. 그 차이. 사실은. 우리가 왜 질투하는가. 왜 그래요. 하나님 닮아서 질투하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을 닮은 특성 중에 하나예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예요. 질투하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시온, 시온이란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 다른 말로 시온이라 말할 수 있죠. 시온을 위해서 쪼금 질투한다가 아니라, 여기 뭐라 그랬어요. 크게 질투한다. 크게 질투한다. 심지어 그를 위하여, 크게 뭐라 그랬어요. 분노까지 하신다. 막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시는 하나님. 아주 인간적이신 하나님이예요. 맞습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 얘기는 뭡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얘기예요.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질투 속에  움직이고 있는 사랑. 그 사랑 . 바람이 나던지, 집에 나가던지, 나는 관심없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주님 이외의 다른 것을 향해서 시선을 돌릴 때, 밤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하나님. 크게 질투하시고, 화내시면서 돌아오라고 촉구하시는 하나님. 그렇게 저와 여러분은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 그래서 시온은 마땅히 시온은  개인적으로 그분의 사랑 받는 대상이 되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되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뭐라 그랬어요. 신붑니다. 신부. 주님의 신부예요. 신부. 주님 보실 때 너무나 사랑스런 신부. 우리 공동체의 심령이 정말 주님을 향하여 드려질 때 우리의 그 순전한 시선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너무 사랑스러워 견디지 못해하시는 하나님. 주께서 보고 싶어하는 우리들 공동체의 모습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받는 공동체. 

두번째, 우리는 스가랴 8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공동체 우리가 회복을 위해서 공동체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먼저 봐야할 공동체의 이상이 있다면 두번째로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3절이예요.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  다들 돌아가시기 직전이예요. 자, 다시 한번 3절 다 같이 시작.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고 있고, 다 돌아올 것을 하나님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만 돌아온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기 3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누가 시온에 돌아와요. 내가 돌아왔은즉 주님이 돌아왔은즉, 동시에 함께 그 백성들과 함께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그리하여 그 예루살렘은 뭐가 되겠고, 진리의 성읍이 되겠고, 진리의 성읍이 된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뭡니까?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가보면 예루살렘 높은 고지대의 언덕에 세워진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도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이 있습니다. 감람산 ,시온산 이 산들이 쭉 에워싸고 있어요. 지금 스가랴 선지자는 이런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환상을 보고 있어요. 그 성이 예루살렘 성이 무슨 성이 되고, 진리의 성읍이 되고, 여기서 강조한 Character는 특성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성읍이 되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 도성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을 보면서 이 산은 무슨 산, 성산, 거룩한 산. 여기 두가지의 Character가 강조됩니다. 하나는 진리, 또 하나는 거룩이예요.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 
저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있다면 진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이 진리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세큘라한 세속적인 공동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다. 우리는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위에 교회는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이 진리 위에서 비로서 교회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최대의 자산은 건물이 아닙니다. 빌딩이 아닙니다. 터전도 아닙니다.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진 교회. 하나님이 말씀이 부요하지 못한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지 못한 교회. 그것은 비워있는 교회일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그것은 진리의 공동체가 마땅히 되어야만 합니다. 진리의 메시지가 선포될 때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빛을 볼 것입니다. 새로움을 경험할 것입니다. 진리의 공동체 그리고 뿐만 아니라, 자, 예루살렘을 아름다운 시온산, 감람산이 에워싸고 있는 것처럼 진리의 교회를 뭐가 둘러싸고 있어요. 거룩한 삶, 거룩의 삶. 거룩의 삶. 저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진리가 진리되기 위해서 또 하나,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거룩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진리와 거룩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수가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이 진리를 받고 나아가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속에 거룩의 삶이 있습니까? 거룩의 삶.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삶으로 진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예요. 진리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삶이 없을 때, 교회에서 선포되는 진리는 하나의 추상적인 강론으로 끝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받은 우리의 삶 속에 거룩이 있을 때, 사람들은 정말 우리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동체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이 바로 진리를 에워 싸고 있는 것이예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제자들을 향한 그들을 향한 마지막 기도의 장면 가운데서 이런 유명한 기도를 하셨죠. 아버지여 저들을 진리로 어떻게요? 거룩하게 하옵소서.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 진리와 거룩이 같이 나왔어요.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그 다음에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장 17절. 아, 위대한 말씀이예요. 외우기도 쉬워요. 요한복음 17장 17절.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따라서 하십시다. 저들을, 우리 편에 이렇게 바꾸어서 읽으십시다.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정말 하나님의 그 기대의 기대를 이루는 공동체가  될려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 그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세번째는 평화의 공동체. 4절 5절. 4절과 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어떤 이미지를 느끼시나요? 4절과 5절을 읽으시면서 어떤 이미지를 느끼세요. 대답까지 다 주었는데. 이미. 평화. Salom. 평화를 느끼잖아요. 어디서 평화를 느낍니까? 늙은 지아비와 지어미가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  혹은 어린아이들이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동남,동녀들이 어떻게 해요. 철없이 장난치고 있는 모습. 평화의 반대개념은 뭘까요.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죠. 그래서 전쟁과 평화를 쓴 작가도 있습니다.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죠. 전쟁이 나오면 제일 피 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전쟁속에서 제일 고생하는 인간군이 있다면 누굴까요. 노인과 아이들이죠. 네.. 전쟁이 나면, 시대가 어려워 지면 제일 피해를 보는 것이 노인과 아이들이예요. 저는 지금 북한이 그럴거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제일 많이 피해를 보일거라고. 그리고 노인들. 노인과 아이들이 제일 피해를 보는 것입니다. 
자,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이제 돌아오고 있습니다. 누가 제일 돌아오지 못했을까요? 자, 먼 길, 페르시아에서 이스라엘, 예루살렘까지 돌아오는 도상에 있어서, 그 먼 길이예요. 아직도. 그리고 교통도 발달되지 않은 그 시대 속에서 살았던 그들에게 있어선 위험한 전이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누가 제일 없었을까요. 돌아온 사람들 중에. 노인이 없었을 거라고요. 그들은 아마 바벨론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예요. 아이들도 포기하고 온 사람들이 많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돌아온 예루살렘. 그들이 꿈을 가지고 돌아오긴 했지만 예루살렘 성은 아직도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예루살렘에 제일 보기 힘든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노인과 아이들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 통해서 지금 이런 또 하나 위대한 비젼을 주고 있는 거예요. 어느 날, 예루살렘에는 늙은 지아비와 지어미들이 거리마다 편안히 앉아 있게 될 것이고, 그리고 동남, 동녀들은 장난을 치며 철없이 그들의 아름다운 웃음을 티없이 맑은 웃음을 터트리면 유희를 하고 있을 것이고, 상상만해도 어떻습니까? 평화를 느끼지 않습니까? 평화의 공동체가 된다. 평화의 공동체. 
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드는 공동체는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공동체 속에서 기대하는 공동체상. 가장, 어떤 공동체상이 되어야 하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평화예요. 교회에 와서까지도 평화를 경험하지 못한다. 이건 어떤 나라 비극이예요. 왜 교회와서 시비거는 사람들이 있는지 몰라요. 시비걸 것이 이 세상에 많은데. 너무 아파서 그럴지도 모르죠. 마음의 상처가 많아서 그럴지도 몰라요.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안식을 경험하는 공동체. 평화를 경험하는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드는 공동체에 대한 주님이 기대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평화의 공동체예요.  

그 다음에 네번째는 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6절 다같이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여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적의 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적의 공동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된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예요. 사실 바벨로니아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예루살렘의 형편은 말이 아니였습니다. 여러분이 느헤미야 1장을 읽어보면 그래서 예루살렘의 보고를 듣고 나서 그 참담한 사정에 대한 보고를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느헤미야는 통곡을 하고 금식을 하면서 웁니다. 그만큼 사정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렇게 회복된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회복된다. 이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사실이예요. 이것은, 기적이 없으면 그 회복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들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어찌 기이한 일이겠느냐? 다시 말하면 나 하나님에게는 그건 문제도 아니다 그 말이죠. 하고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성경에 그런 사건이 얼마나 많아요. 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뭘 약속하셨습니까? 자녀를 약속하셨죠. 그러나 이미 인간적으로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생리적 한계를 넘어셨습니다. 이제. 근데 하나님이 다시 천사를 통해서 다시 자녀를 주신다는 메시지를 주셨더니 아브라함과 사라가 최초로 보였던 반응은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어떤 반응을 보였어요. 웃었죠. 아~~~히. 그럴니가 있습니까. 하나님 농담도 너무하시지. 이 나이에 제가 무슨 자녀예요. 이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 여호와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내가 하고자 한다면 내 눈에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이런 메시지가 성경에 반복되는 장면이 여러 Case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서 32장에 봐도 이제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결정적인 유다의 멸망을 마지막 멸망을 예언합니다. 허나, 멸망을 예언하는 동시에 회복을 예언합니다. 이제 나라가 망하는 것은 뻔해요. 그런데 망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데 회복은 눈에 안보이거든요. 그 때 예레미야 32장 26절 이하에 보면 또 그 메시지가 나와요. 나, 여호와께 능치 못함 있겠느냐? 내가 하고자 한다면. 내가 하고자 한다면. 여러분 기울어져 가는 가정. 기울어져 가는 사업. 기울어져 가는 내 인생의 운명 앞에서 사람들은 멸망을 볼 뿐, 침륜과 좌절과 낙심과 황폐를 볼 뿐. 그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대부분의 회복을 보지 못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내가 하고자 하면 그것이 문제겠느냐. 네 눈에는 그것이 기이함일 것이다. Wonder 놀라움일 것이다. 기적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능치못한 일이 없느니라. 바로 이런 죽은 것을 살리시고, 그리고 헐어진 것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은 바로 치유의 하나님. 회복의 하나님. 그리고 치유와 회복을 가능하게 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안에는 언제나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 무너졌던 가정이 다시 벌떡 일어나요. 인생에서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인생을 다시 살기 시작되는 모습들. 기적의 공동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의 모습이 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적의 공동체. 

다섯번째는 7절과 8절에 보시면 성실과 정의 공동체입니다. 성실과 정의 공동체. 같이 읽겠습니다. 7절, 8절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백성들의 구원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구원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설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으므로 주 앞에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길것인가. 두가지 단어가 강조되었어요. 뭐예요. 성실과 정의. 하나님 자신도 내가 너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실과 정의로 너희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이예요. 하나님의 속성이 굉장히 많이 있지만 여기서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대표적인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그 분은 성실하신 하나님. 그리고 의로우신 하나님. 따라서 구원받고 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들의 삶 속에도 하나님은 동일한 성실과 의를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실과 의로움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요구하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바로 이런 성실과 의에 공동체가 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실과 의에 공동체. 

그 다음에 9절부터 13절까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축복의 공동체예요. 9절부터 13절까지. 축복의 공동체. 먼저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의 회복을 다시 한번 약속합니다. 9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성전을 짓다가 중간에 스톱을 했어요. 일단. 생각나십니까? 그들을 다시 격려하시는 것이예요. 손을 견고히 하여 다시 일어나 이 전을 건축하라. 성전 건축을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성전 건축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시 전체의 회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0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그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전의 상태예요. 전에는 10절은 전에는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전에는. 그러나 11절에 가면 전에는 단어와 대조를 이루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무슨 단어일까요. 
이제는. 11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달라진다 이 말이예요. 예루살렘의 형편이 바꿨진다.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질 것이냐? 
12절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은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려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바뀐다 이 말이예요. 새로운 시대가 온다. 축복의 시대가 온다 이 말이예요. 
드디어 13절 그 절정입니다. 13절 다 같이 시작.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자, 13절에도 대조가 되는 두개의 단어. 어떤 단어가 대조를 이룹니까? 저주와 축복.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다. 과거에는 너희가 저주가 되었고, 부끄러움이 되었다. 너희는 부끄러운 존재요. 부담스러운 존재요. 재앙스러운 존재요. 저주스러운 존재였다. 이제는 자, 13절 가운데 중요한 단어. 다시 뭐예요. 이제는, 이제는. 중요한 단어. 이 과거, BC와 AD. 하나님이 오시고 주의 손길이 내 인생의 장에 임하시면 전에는, 이제는 이 변화가 나타나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전에는 절망하며 어둠속에 살았으나, 이제는 이제는 하나님의 빛이 내게 임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뭐가 되게 하리니 축복이 되게 하리니 줄쳐 놓으세요. 축복이 되게 하리니. 축복이 되는 존재. 축복이 되는 공동체.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는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부끄러움으로 만들었어요. 조소의 대상으로. 멸시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예요. 회복을 약속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저주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축복이 되리라. 이 세상에 축복이 되리라. 교회가 영광이 될 것입니다. 축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때로 그 공동체를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러나 다시 우리가 회개하고 주 앞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다시 당신의 백성 공동체를 어떻게 만드신다고요 축복이 되리니. 다 같이 축복이 되리니. 축복이 되리니. 이 축복의 공동체 소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일곱번째로 14절부터 17절까지는 진실의 공동체. 진실의 공동체. 하나님의 공동체에게, 그 백성들의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기대하는 한가지 또 특성이 있다면 진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실. 자, 우리 특별히 16절만을 읽습니다. 대표로. 16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너희가 행한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이 16절에 두번씩 강조한 단어가 뭐예요. 진실. 두번씩 강조되었어요. 네, 반복되는 단어는 강조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항상. 너희의 행할 일은 이러하니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앞으로는 이 회복의 공동체안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 너희는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성문에서도 진실하고 또 재판을 할 때도 뭐예요. 화평한 재판을 베풀며. 이 화평한 재판의 바탕도 진실입니다. 진실이예요. 또 17절에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진실의 반대가 뭘까요. 거짓이죠. 거짓. 일반적으로 말이죠. 우리 한국 사람들의 윤리관에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죄를 범하면서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죄가 거짓말입니다.
제가 미국 살면서 느낀 것은 미국 사람들은 섹스 같은 것은 그렇게 큰 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애요. 일반적으로. 이번 클린턴 사건에 있어서도 재판할 때 초점이 뭐냐하면 그 부정한 행위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 재판의 핵심이 뭔지 아세요. 거짓 증언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게 문제예요. 그런데 우리 한국 같은 데에서는 누가 스캔들이 일어났다 하면 스캔들 가지고 난리를 치는데 진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진실. 너무 쉽게 거짓말을 해요. 너무 쉽게. 크리스챤들도. 너무 쉽게 거짓말을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진실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 언어와 입술이 진실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어떤 거짓말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쫒기는 그런 경우들도 있지만, 그 때라도 진실하려고 저는 애를 써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실한 마음. 진실한 태도.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진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진실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진실을 구하십시다. 거짓말할 사건이 생기면 차라리 입을 다물어요. 차라리 입을 다물어요. 진실을 추구해야 합니다. 진실의 공동체 

여덟번째로. 18절과 19절에 있어요. 하나님이 백성들의 공동체에 기대하는 또 하나의 모습. 공동체의 모습. 저는 그것을 기쁨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기쁨의 공동체.
자, 18절. 다시 이 말씀으로 시작되죠.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19절 다 같이 시작.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 그들이 바벨로니아 포로생활할 때 일년에 몇번씩 금식했다고 그랬어요. 4번 금식했다 그랬죠. 그 금식의 사건을 얘기해요. 그러나 이제는 이제는 너희들이 기뻐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슬퍼해야 할 때가 있어요. 금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노다지 크리스챤 라이프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늘 금식만 하고 늘 굶어갔고 그냥 우거지 상만하고 다닌다면 믿지않는 사람들이 볼 때 매력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예수님이 심지어 금식할 때에도 금식하는 티내지 말고 뭐예요. 금식할 때일수록 더 칠하고 바르고 더 볶으고 더 그래야 되요. 금식할 때일수록. 슬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동체가 기쁨의 공동체가 되길 원해요. 기쁨의 공동체. 그래서 우리 안의 넘치는 기쁨을 봤을 때 아, 예수 믿는 것이 매력이 있다. 기쁨이 있다. 
워싱턴에서 한 이번의 사랑의 순례에 아주 최근에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커플이 하나 있었는데 끝나고 나서 소감이 어떠냐고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즐겁고 기쁠수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안에도 있을 수는 기쁨. Enjoy. 세상 사람들이 넘볼 수 없는 특이한 joy. 기쁨. 이 기쁨의 공동체. 뭐 그런데 그 기쁨이 괜히 기뻐하는 것이 아니예요. 뭐 때문에 기뻐하는가? 기쁨의 이유가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는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라. 하나님의 가치에 대한 기쁨. 하나님의 꿈에 대한 기쁨.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괜히 뭐, 내 아들 입학만해서 기뻐하고 그런 기쁨이 아니고 그런 기쁨이라면 잘못된 일상이면 또 기뻐하고 그러나 우리의 기쁨은 환경에 의존되지 않은 그 보다 더 중요한 기쁨. 하나님의 가치를 추구하는 기쁨. 하나님의 꿈을 추구하는 기쁨. God's Dream. 하나님의 꿈을 붙잡고 기뻐하는 기쁨. 이런 기쁨. 이런 놀라운 기쁨이 있을 때 아, 저 사람의 삶은 다르다. 저들의 삶은 다르다. 그리고 저 교회는 좀 다르다. 우리가 느끼는 이 놀라운 기쁨.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구합십시다. 

자, 20절부터 22절 아홉번째로 한마디로 구원의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구원의 공동체. 우리  20절부터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매력있는 모습을 보고 그 공동체의 매력과 향기를 보고서 야, 우리도 은혜받는 것이 좋겠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열방의 백성들이, 이방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말이예요. 22절 다같이 읽어요. 다 같이 시작.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이것이 바로 구원의 공동체의 비젼이예요. 구원의 공동체의 모습.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동체안에 넘치는 독특한 삶의 질과 그 특성을 보고 야~ 나도 교회 갔으면 좋겠다. 교회 갔으면 좋겠다. 저는 어렸을 때 교회 안 다녔어요. 늘 교회가 부럽더라구요.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양 소리. 교회 다니는 아이들의 즐거운 표정.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나가야지. 나도 언젠가는 나가야지. 뭔가 그 기쁨의 모습들이 보이더라구요. 그것이 매력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목마른 갈증을 일으킬 수 있는 삶. 구원의 갈증. 새로운 생명의 갈증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23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저는 이 마지막 절을 성장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혹은 확장의 공동체. 성장의 공동체. 이미 알고 있는 유다 사람 한 사람을 이방 사람 몇 명이 그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져요. 열 사람이 붙들고 늘어지면서 야~ 우리도 가서 은혜 받자. 여기서 열 사람이 나와요. 열 사람. 다시 만수가 나와요. 만수. 이것은 많은 열국들의 그 구원의 놀라운 소식들이 많은 열국 가운데 확장되고, 그리고 수많은 열국들이 유대로 몰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예요. 영향력. 우리의 영향력을 말하고 있는 것이예요. 구원의 위대한 역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넘쳐나는 모습. 그래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연합하여 공동체가 확장되어 가는 놀라운 모습의 비젼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공동체는 그랬어요. 구원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날마다 더해갔습니다. 날마다 더해가요. 날마다. 핍박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탄의 역사로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크리스챤들은 핍박만 받은 것이 아니예요. 핍박과 동시에 강조된 또 하나가 칭송이예요. 핍박과 칭송을 함께 받았던 교회. 핍박하면서 칭찬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매력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잡아 당기고 있었습니다. 계속 사람들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이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비젼은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전체의 역사는 그 비젼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영향력이 확산되고 확장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이 성장의 공동체. 이 확장의 공동체. 땅끝까지 나아가는 공동체.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모습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이 위대한 하나님의 꿈의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되었다. 여러분 감사하십니까. 교회 나왔다 이 보통 사건이 아니예요. 보통 사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 교회가 잘못도 많이 했어요. 어떤 때는 부끄럽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것도 사실이예요. 그러나 빌 하이블 목사의 선언처럼 교회는 아직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교회는 유일한 하나님의 비젼이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것은 피상적인것에 불가해요. 나는 이번에 워싱턴 교회에 가니까 이인제씨가 왔었요.  앉아서 이인제, 이인제. 이인제씨가 저보고 선배라고 그러더라구요. 고등학교 제 후배가 되서, 그래서 앉아서 얘기를 많이 했었요. 그 김만풍 목사님이 이인제씨를 소개하다가 이인제 지사 발음을 잘못해서 이인제 집사라고 발음을 했었요. 제가 그랬습니다. 그 사람보고 당신이 정말 큰 일을 한번 하려면 저분이 지금 예언했으니까 예언한대로 앞으로 당신 예수 믿고 집사가 되어야 된다고요. 가만히 제가 대화를 하면서 느낀 것도 뭐냐하면 한국 정치인들의 생각이 아직도 피상적이다라는 생각이예요. 피상적이다. 인간 존재의 깊은 곳을 바라보는 눈이 없었요. 물론 좋은 정치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속 심령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은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복음. 복음을 가진 교회.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 세상의 유일한 비젼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이 위대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 공동체. 그 공동체를 향해서 내가 너희들이 실은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막 질투하시는 하나님. 안달을 하시는 하나님.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은 동일한 기대를 안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숙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 위대한 공동체를 만들어 이 세상 앞에 하나님의 꿈의 공동체를 나타내는 것. 그래서 여기서 목 마른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해갈하고 그들의 인생이 바뀌고 삶의 변하는 위대한 비젼이 나타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꿈이 우리안에 이루어지길 기도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가 통성으로 같이 기도하실 때 오! 하나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꿈을 이루시고, 우리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주옵소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귀한 말씀을 받았사오니 이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역사를 감당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성령이 역사하시고, 주의 권능이 나타나시어서 아버지, 우리 가운데 하나님 뜻을 이루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음악 배경~~~~)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공동체 상을 함께 같이 나누었습니다. 오~ 하나님 그 때나 이 때나 동일한 가슴과 동일한 기대를 안고 당신의 백성을 굽어보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그러한 꿈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수요일 이 오후, 귀한 말씀을 받고 다시 떠나갑니다. 참으로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기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아갑니다. 주여 우리를 이 하나님의 백성 위대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삼아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공동체가 있는 한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함께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드려진 헌금이 또한 이웃들을 살리고 세우고 격려하는 그런 귀한 사랑의 헌금으로 쓰여지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말씀을 받고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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