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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신학/설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시15편)

by 꿈꾸는 나무의자 2020.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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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시 15편

김 이 곤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구약학)

“야훼여, 당신의 거룩한 산(山)에 머무를 자 누구니이까?”라고 시편 15편 시인은 하나님께 여쭙고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산(聖山)”은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라고 널리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출 3:12; 19:3). 그러므로, 시편 121편 시인도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산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물의 일부분일 뿐이다(시 104:8). 결단코, 그 산이 그 자체로서 신성성을 지닌 것이거나 또는 특별히 다른 큰 의미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산은 산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121편 시인은 그 거룩한 산을 향하여 구원의 출처를 묻는 그 물음에 대해서는 다만 “나의 도움(구원)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로부터 오리로다”라고만 대답했던 것이다. 즉 진정한 “도움”이란 산(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야훼”로부터만 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산에 계신다는 것이다. 단지 산일 뿐인 그 산에 야훼께서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산을­그 “하나님의 산”(출 3:1)을­성서는 “성산”(聖山:har-kodsheka)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시 15:1).

그렇다면, 그 거룩한 산은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산이기 때문에 산(山)이 아니라는 말인가? 분명히, 이스라엘의 찬양의 대상에는, 거룩한 산(山)이든 거룩한 도성(city)이든 거룩한 왕(王)이든 그 어떠한 것도 찬양의 대상으로 지목된 바가 없었다. 찬양의 대상은 오직 야훼뿐이었다. 산(山)은 산(山)일 뿐이요 성(城)은 성(城)일 뿐이요 물은 물일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야훼여, 당신의 거룩한 산(山)에 머무를 자 누구니이까?라고 하며 그 산(山)에 오르는 일과 그 산(山)에 머무는 일이 최대의 희망의 대상으로 노래될 수 있었다는 것은, 오직, 그 산(山)에 야훼께서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만이며 또 그 산(山)도 또한 어디까지나 진솔하게 산(山)으로서만 있었기 때문이다. 산(山)이 스스로 자기를 격상시켜 감히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성화(聖化)시키거나 하지 않고 단지 산(山)으로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그 산(山)을 능히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산(山)에 오를 수 있는 자의 윤리를 말할 때, 이 시인은 놀랍게도 인간행위의 완전성과 그의 행위의 의로움을 전적으로(!) 그의 윤리와 그의 신앙의 “내적 진실성(inward truthfulness)”에게로만 돌리고 있는 것을 본다!! 진실!! 모든 윤리행위와 모든 도덕행위, 모든 신앙행위와 모든 경건행위, 모든 정의로움과 모든 선행은 그 “내적 진실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것”(시 15:5)이 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시대는 그러나, 산을 산이라고 하지 않고 물을 물이라고 하지 않는 시대다. 산을 산(山)이라고 말하면 안된다고 힘있는 자가 위협하면, 사람들은 쉽게 산을 물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것이 산이면 어떻고 물이면 어떠냐는 것이다. 산을 물이라고 말하면 네 신상이 이롭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하면 사람들은 또한 쉽게 물을 산이라고 말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한 성철의 뜻하는 바도 이런 것이었을까? 철학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산을 물이라고 더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이 더 쉽사리 그런 경향성을 취하는 것 같다. 아무리들 그렇게 말하더라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뿐이다.

우리 사회에서부터 “진실”이 사라진지는 벌써 오래된 것 같다. 왜 예수님은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막 10:15; cf. 마 19:14; 눅 18:16)라고까지 하신 것일까? 한국의 어느 어린아이가 북한의 공비를 보고 “공산군이다!”라고 말하였다가 그 공비에게 사살되었다고 한다. 악(惡)이 선(善)을 추방하는 세상이요, 거짓이 진실을 살육하는 세상이다. 산을 산이라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악이고 산을 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선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흔히들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본 모습이라고들 한다. 사람은 악해야 성공한다고들 말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어느덧 세상원리는 뒤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그 산(山)에 오르려는 사람, 그리고 그 산(山)에 머물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러한 세상 원리와 맞서서 싸워야 한다고 시편 15편 시인은 말한다. 왜냐하면, 야훼는 야훼요 산은 산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야훼께서 산(山)에 머무신다 하여 야훼를 산(山)이라고 하거나, 산(山)에 야훼께서 머무신다고 하여 산(山)을 하나님이라고 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고 야훼는 야훼라고 말할 수 있어야 참 삶의 원리가 우리 안에 생존하여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 5:13),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하신 바가 있다. 이를테면 부름 받은 자와 세상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소금과 세상이, 빛과 세상이 구분 없이 동일하게 되어서는 희망이 없다고 보신 것이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다. 하나님 이외에는(시 139:12) 어느 누구도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고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있다.

(호이!)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

들에게 화 있을진저(호이!)            (사 5:20)

자기 이익에 맞기만 하면, 그리고 힘있는 자의 눈치에 맞추기 위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쉽게 말을 바꾸어 진실을 왜곡하는 것 그것이 최선이고 그것이 지혜라고 말하는 삶의 원리와 인생철학은 인간사회의 생존을 위협하는 항구적인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파멸요소라고 이사야는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The perversion of moral standards on the principle that whatever is pleasurable is permitted has been a permanent destructive element in every society and every individual life.).

그렇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뿐이다. 야훼는 야훼이시고 그가 머무시는 그 산조차도 산은 단지 산일 뿐이다. 그렇다! “깨끗한 사람! 남의 허물은 들추지 않는 사람, 이자를 계산하며 돈을 빌려주지 않는 사람, 거짓증거하거나 뇌물을 받거나 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단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일뿐이며,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시 15편). 진실로, 그렇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산(山)에 머무를 자 누구니이까!”라는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은 분명하다. 즉 이 시(詩)는 비록 제의(祭儀:예배의식)를 위하여 고안된 노래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헌물 드리는 일이나 종교의식을 행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는 일 없이 오직 인간의 도덕적 태도와 사회윤리 문제에만 전적으로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바로 여기에 “신의 뜻”(토라)을 찾으려는 이스라엘적 경건의 특유성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경건은 도덕적 성취와 윤리적 행위의 공적에만 관심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율법주의의 모순에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시편 15편은, 그러나 인간행위의 “완전성”과 그의 행동의 “의로움”(正義)을 결코 인간행위의 공적주의나 율법주의 이데올로기와 결부시키지 않고, 오직(!) 그의 신앙의 “내적 진실성(inward trustfulness)”에게로만 돌림으로써(2절)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통하여 가르친 그 기본적 신앙윤리의 개념에 도달한 것이다! 즉 “진실의 원리”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야말로〈결코 흔들리지 않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경건〉이라는 것(5c절)이다. 산(山)은 산이요 물은 물일뿐이다. 산(山)은 산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은 물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절정에서, 예수께서는 “오직 너희는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惡)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마 5:37)라고 역설(力說)하셨던 것이다. 분명히 그렇다. 감히, 하나님의 산(山)에 영원히 머물면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려는 사람은 “야훼는 야훼요, 산은 산이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야훼께서 산(山)에 머무신다 하여 산(山)을 야훼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고 하여 성전을 하나님이라고 하여서도 안된다(참조. 렘 7:4의 저 유명한 예레미야의 절규!). 나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곳, 성전과 같은 것이라고 하여(고전 15:19), 그 몸을 하나님이라고 하여서는 더욱 안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뿐이다. 그러므로, 예언자 아모스는 “너희는 나(야훼)를 찾으라. 그러면 살리라. 벧엘도 찾지 말며, 길갈로도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암 5:4-5)라고 절규하였던 것이다. 시편 121편 시인도,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산(山)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구원)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구원)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로다!”라고 고백하면서 시편 15편 시인의 신앙과의 일치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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