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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회복하여 주소서 (시편80:1-7) 이수영목사

by 꿈꾸는 나무의자 2018.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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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편 80:1~19

설교: 이수영 목사

제목: 우리를 회복하여 주소서


시편 80편은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탄식시로서 나라의 회복을 비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분노를 멈추시고 그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탄원하는 것입니다. 후렴처럼 거의 같은 말로 반복되는 본문 3, 7, 19절만 봐도 이 시편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고, 7절에서는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며, 19절에서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편 80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주로 드린 세 가지 간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돌이켜주소서” 또는 “우리를 회복시켜주소서” 하는 간구입니다.

둘째는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하는 간구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는 간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 세 가지 간구는 그들로 하여금 그런 간구를 하게 만든 그들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구원을 간구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는 간구를 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멀리 떠나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돌이켜주소서”, “우리를 회복시켜주소서” 하는 간구를 한 것입니다. 셋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얼굴빛이 그들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하는 간구를 한 것입니다.

실제로 시편 80편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앗수르 제국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하고
2절에서는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한 것만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이고 그들을 족장으로 하는 두 지파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 중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강성하고 대표적인 지파로서 이스라엘이 남북 두 왕국으로 갈렸을 때 북왕국을 주도하는 중심 지파였습니다.
베냐민은 요셉의 유일한 동생으로서 요셉과 함께 아버지 야곱이 같은 어머니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과 연접해있었기 때문에 그 일부가 예루살렘 지역을 통치하는 남왕국에 머물러 있었지만 본래는 북왕국에 속한 지파였고 종종 에브라임, 므낫세 두 지파들과 연합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로 대표되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우상숭배에 빠져버렸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결과 이방제국 앗수르의 말발굽 에 밟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시편 80편을 한 절 한 절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2절을 봅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여기서 우리에게 들리는 간구는 “빛을 비추소서.” 하는 것과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빛을 비추심과 능력을 나타내심과 구원하심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얼굴을 다시 돌리시기만 하면 그들을 위해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빛을 비추신다는 것은 그의 백성에게는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른바 “아론의 축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6:22-27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곧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며 은혜를 베푸시고 평강을 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 곧 복을 잃는 것이고 저주이며 멸망입니다.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곧 구원이며 모든 것을 다시 찾는 일입니다.

이어서 본문 4-6절을 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노하시게 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르짖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실 만큼 그들이 하나님을 노하시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매일 밥 먹듯이 하루도 쉬지 않고 눈물을 먹고 마셔야 하는 세월이 계속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대적으로 변한 이웃나라들에게 조롱과 노략질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족속이 왜 이리 약하냐?” “너희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는가 보자.” 하는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본문 8-13에서는 지난날의 영화와 참담한 현실을 비교하며 탄식합니다.

8절을 봅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내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거기 민족들을 내쫓고 살게 하신 역사를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9-11절을 계속해서 보면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가나안 땅에 잘 정착해 살며 번영했던 역사와 이스라엘의 영토와 국력이 왼쪽으로는 지중해에 미치고 오른쪽으로는 유프라데스 강까지 뻗쳤던 역사를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12-13절은 외적의 침탈로 황폐해진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담”은 포도경작지를 넘보는 사람이나 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우던 울타리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영토의 경계선이 짓밟혀 무너지고 주변 외적들의 노략거리가 되고만 나라의 형편을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14절에서 그들의 간구를 들어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얼굴을 돌려주시며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것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5-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던 사랑을 상기시키며 그의 긍휼을 구합니다: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하나님께서 친히 심으시고 힘 있게 자라게 하신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벌 받을 일을 해서 벌을 받는 것은 좋으나 아주 멸망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권능의 손으로 구원하여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런 간구와 함께 하나님 앞에 다짐하는 것이 본문 18-19절입니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이스라엘을 다시 소생시켜주시기를 구하며 그들이 다짐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한 것과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한 것입니다.
둘 다 다시는 하나님께 신앙의 불충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찾으며 하나님께 신실하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본문 1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하나님께 “빛을 비추소서” 간구하며 하반절에서 하나님을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라고 부릅니다.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란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위에 상징적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덮개를 속죄소라 부릅니다(출25:17) “속죄소”는 “시은소” 또는 “시은좌” 즉 “은혜의 자리”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며 그리스어 번역으로는 “백성의 죄가 용서되는 곳”입니다. 이 속죄소라 불리는 언약궤 덮개의 두 끝에는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는 그룹 둘이 있습니다(출25:18-20).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속죄소가 있는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감으로써 이스라엘 온 백성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겟다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에 호소하며 구원을 간구한 것입니다.

오늘 시편 80편은 삼일절 기념 주일을 다시 맞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바가 큽니다.
삼일절은 지금으로부터 94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가 독립국이며 우리 민족이 자유민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한 우리 민족의 위대한 궐기를 기념하는 국경일입니다. 삼일독립운동의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세계 속에서 어깨를 들 수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이 발전과 번영을 지속시켜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책임을 다하는 확실한 길은 오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신실하고 충성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시는 한 우리는 그 어떤 외세의 위협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얼굴빛을 돌리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너무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 많이 행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얼굴빛을 돌리시지 않을까 염려될 때가 많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일본이 점점 더 우리를 업신여기며 우리에 대해 저지른 과거사를 부인하고 오히려 우리 영토에 대한 야욕을 노골화하고 있는 때입니다. 북한정권은 북한정권대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을 파괴시키겠다고 공공연하게 협박하고 있는 때입니다. 나라는 이런 때 국민을 안심시킬 확고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할 이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서 얼굴빛을 돌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80편은 <아삽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삽은 다윗이 예루살렘 성전의 찬양대장으로 임명한 사람입니다.
<아삽의 시>라고 해서 모두 아삽이 직접 지은 시는 아닙니다. 아삽이 그 첫 대장이었던 성전찬양대원들이 계속해서 수집했고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어온 찬양시들의 모음집에 수록된 모든 시편을 <아삽의 시>라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80편은 북왕국이 망한 후 지어진 시일 것입니다. 북왕국 사람들이 지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남왕국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용 찬양으로 사용된 시편이라는 것입니다.

즉 남왕국 유다 백성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함락 소식으로부터 받은 충격과 그로 인한 애통과 비탄을 노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남북으로 갈리었고 서로 대치하여 싸우기도 했던 두 나라지만 한 민족이라는 뿌리 깊은 의식과 동포에 대한 연민의 정을 깊이 느끼게 하는 시입니다.
내가 당한 일이 아니지만 내 동포가 당한 점령과 파괴와 약탈과 치욕과 수모를 내 일로 여기며 함께 아파하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쪽의 동포들을 구원해주시기를 애원하며 “그들”이라 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끝의 두 절 18-19절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봅니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우리도 우리의 북녘 동포들을 위해 그런 심정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당신의 얼굴빛을 비춰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께로 돌려놓아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이 자유와 평화 가운데 하나 되고 함께 잘 사는 나라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북녘의 동포들이 무자비한 폭압통치와 잔혹한 인권유린의 희생이 되지 않도록 쉬지 않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삼일독립정신의 열매와 그 기쁨을 우리 온 민족이 함께 누리며 사는 날을 위하여 더 하나님께 신실한 우리들 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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