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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대제사장이 계신다(히브리서4:14-16) 옥한흠 목사

by 꿈꾸는 나무의자 2017.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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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신다/ 히4:14-16




유학시절에 작은 도시에 있는 한인 교회를 8개월 동안 섬긴 일이 있습니다. 성도는 30여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 교인들 중에 2/3는 의사 가정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일정 기간 동안 미국은 부족한 의료인들을 한국에서 보충하기 위해 의대를 졸업한 사람들을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많은 의대 졸업생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밤잠을 자지 아니하고 땀 흘리며 수고하여 전문의 자격을 땄습니다. 그들이 미국 이곳 저곳에 흩어져서 개업을 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성공하여 그곳에 한국의 이미지를 좋게 심고 있었습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가 있는 도시에도 한인 의사들 약 15명 정도가 개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들 중에 일부가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의사가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똑똑하지 않습니까? 똑똑하고 머리가 좋기 때문에 부인들도 아주 좋은 사람들을 얻는 것 같았습니다. 부인들도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생활이 안정되고 소위 성공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반을 닦은 의사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어느 날 밤을 제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의사 중에 한 분이 저와 몇 명의 교인들을 자기집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분이 좋은 집을 샀기 때문입니다. 큰 정원이 있는 3층짜리 멋진 양옥집이었습니다. 이 의사가 안내하는 대로 지하실로 내려가 보았는데 최고급 오디오 장비를 갖추어 놓고 필요할 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 감상실이 있었습니다. 또 예수를 믿는 집인데도 이상하게 어느 방은 온갖 종류의 양주병들이 진열되어 있는 장식장이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울적하면 내려와 한잔 마시면서 기분을 풀 수 있는 카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침실을 비롯하여 어느 방이나 그 화려함이 굉장했습니다. 그 의사는 자기가 그만큼 성공하고 화려하게 산다는 것을 은근히 내 비치려고 그랬는지 상당히 우쭐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날 밤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저와 나이가 비슷한 그 의사의 형편과 저의 형편이 비교되면서 제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족도 데려 오지 못한 채 한 달에 겨우 몇 백 불로 공부하고 있는 목사요, 유학생의 신세였기 때문에 그 의사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저 자신도 모르게 그런 감정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벌써 26,7년이 지난 세월이지만 아직도 그날 밤에 받은 인상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미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의사가 자기 병원 로비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제가 그 소식을 전화로 듣고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래도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해왔을 텐데. 무슨 고민을 안고 씨름하다가 자살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믿었던 예수님이 그에게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자신의 믿음이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때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런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도대체 그 사람의 믿음 생활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마음에 두려움을 안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남이 모르는 좌절감과 열등감으로 씨름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까? '예수 믿어 봐야 나에게 그렇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내 믿음이 나의 고민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이 귀한 말씀을 통해서 해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어도 잘못하면 그 의사처럼 정말 비참한 결말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정말로 나를 구원해야 될 그 순간에 믿음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는 식의 신앙 생활이라면 왜 믿음을 가져야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당시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별히 써보내신 계시의 말씀이었습니다. 히브리서를 받아본 독자들은 당시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로부터 완전히 추방당한 것은 물론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핍박 속에서 몸부림을 쳐야만 했습니다. 생업도 다 박탈당했기 때문에 자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 밑바닥 생활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입니다. 단지 예수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조소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잠깐 1,2년 정도만 지속되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더 그런 생활을 해야 되는지, 이 어두운 터널이 언제쯤 끝나게 될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를 저버리고 옛날 유대 사회로 다시 돌아가는 배교의 일들이 계속 이어졌던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믿어서 어떻게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더 이상 나는 못 견디겠다.' 그래서 예수를 부인하면서 백기를 들고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서를 보면 그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이 간혹 나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3장 12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4장 1절에도 상당히 무서운 경고가 나옵니다. 이런 어려움에 처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를 써 보내신 것입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잘못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해결책을 응답으로 주시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핍박을 하루아침에 다 잠재운다든지 그들의 가난을 풍요로운 생활로 바꾸어 주신다든지 하는 식의 해답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해답을 주시기 전에 오히려 하나님은 먼저 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큰 대제사장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바라보라.' 그분을 바라보면 모든 해답과 모든 은혜가 다 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말씀하는 내용이 4장 14절부터 16절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큰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4장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대제사장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구약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은혜들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는 중간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이 제사장과 제사장들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와 같은 위치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 있는 대제사장과 다르십니다. 구약에 있는 대제사장은 불완전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이 완전하다는 의미를 우리 성경에서는 '크다'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입니까?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예수님은 참 사람이십니다. 우리는 그 신비의 진리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모든 신비한 축복에 대해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나 하늘 나라의 축복에 대해 잘 몰라서 우리를 돕는데 있어 실수하실 확률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가 없으시면서도 인생이 당하는 모든 연약함과 고통을 친히 맛보셨습니다. 15절 중간에 나오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본인이 직접 사람이 되셨고,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너무나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인간의 연약함도 알고 계시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도 알고 계시고, 그들에게 당장 하나님께서 내려 주셔야 될 은혜가 어떤 것인가도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우리를 실망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도 완전히 아십니다. 사람도 완전히 아십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알고 완벽하게 우리를 위해서 축복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아무리 핍박이 심해도 이길 수 있고 아무리 가난 때문에 고생해도 날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할 때, 실망할 때, 연약해서 몸부림 칠 때,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 고독 속에서 헤맬 때 위로를 받고, 평안을 유지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완전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보고 믿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꼭 실천해야 됩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 되심을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14절 끝에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철저하게 믿고 붙들어야 비로소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굳게 잡으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라테오(krateo)'입니다. 무엇인가를 잡을 때 손에 힘을 주지 않습니까? 특별히 남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될 소중한 것을 손에 쥐었을 때는 어느 때보다도 힘을 더 강하게 줍니다. 이렇듯 꽉 잡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꽉 붙들고 놓지 아니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대제사장 되신다. 그분은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신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나의 대제사장 되심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믿고 고백하고 꼭 붙들면 그 생각이 나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 믿음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제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3장 1절의 말씀과 같이 깊이 예수를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누구든지 생각에 몰입하려면 절대 흔들리지 아니하는, 내 마음을 온통 빼앗길 수 있는 어떤 내용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내용을 가질 때 그것 때문에 깊은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대제사장이 되신다. 그분은 절대 나를 실망시키지 아니하시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면 그 예수님이 나의 모든 사상과 감정을 지배하면서 나를 장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놀라운 위로와 평안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4장 15절이 해답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나 중학교 다닐 때 아무도 이 본문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의미가 전달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사용하는 쉬운 말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우리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시요.' 동정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연약한 것을 다 아십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더욱이 완전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연약, 그 자체입니다. 얼마나 연약함이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불쌍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이렇게 동정을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동정한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쉬운 것 같아도 사실 어려운 것입니다. 왜 어렵습니까?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형편을 먼저 이해한 후해야 동정이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를 하려면 내가 그 사람이 신고 있는 신발을 함께 신어야 됩니다. 즉 그 사람의 처지를 내가 비슷하게나마 경험할 때에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될 때 동정심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남편이 중병을 앓게 되었을 때 교역자들이 찾아가서 슬퍼하고 있는 새색시에게 '참, 안됐지만 주님을 바라보세요. 우리 주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라며 위로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기가 안 당해 봤기 때문에 그 자매의 마음에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결혼했는데 반년도 안 되어 아내가 중병에 걸려서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는 고통스런 상황 가운데 지금 씨름하고 있다면, 혹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비슷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동정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건강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저보다 연배가 위인데도 40대의 건강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건강하기 때문에 사람이 밝습니다. 시사잡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가장 첫번째 꼽는 것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건강이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생각도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있고, 항상 밝은 얼굴로 기쁘게 일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목사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뵈면 제가 그만큼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기분이 나빠집니다. 언젠가 한번은 저에게 이런 저런 재미있는 자랑을 하시기에 그 이야기를 듣고서 지금 몸이 편치를 못해 같이 앉아 식사를 하면서도 이야기도 잘 못해 죄송하다고 했더니 대뜸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날마다 아픈가?' 자기는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기분이 나빠져서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강단에서 절대 고통에 관한 설교는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목사님은 그런 설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더니 그 분이 '허허, 듣고 보니 그렇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동정하고 그 사람 편에서 조금이라도 눈물을 함께 흘리려면 비슷한 상황을 자신이 경험해야 되고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습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연약함과 고통을 맛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큼 가난 때문에 고통 당한 일이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힘들어하는 형제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만큼 가난해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아침을 굶으면서 하루를 시작해야 될 때가 왕왕 있었습니다. 예수님만큼 슬픔을 가슴에 안고 괴로워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는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똑 같은 슬픔이라도 그가 느끼는 강도는 우리보다도 몇 천배, 몇 만배 더 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슬픔을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큼 공포로 인해 밤새도록 씨름해 본 일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공포를 여러분이 체험해 봤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연약함을 다 경험하시면서 그 연약함으로 인한 고통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2장 18절을 보십시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우리 가운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는 생각이 자주 드는 분이 있습니까? 그 생각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가장 잘 알아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완전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할렐루야! 죄를 짓고 고통 속에서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이해하고 여러분을 동정하시는 분이 딱 한 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꼭 붙드십시오. 능력이 따라가지 못해 실패하고 경쟁에서 뒤져서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될 지 몰라 막막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시고 여러분을 도우려고 하시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완전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꼭 붙드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4장 16절은 얼마나 은혜스러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런 말씀은 외우면서 늘 마음에 두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할렐루야! 은혜의 보좌입니다. 심판의 보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잔뜩 쌓아 놓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기만 하면 주시겠다고 준비한 보좌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쌓아 놓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디모데전서 1장 14절에 있는 말씀대로 항상 넘칩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하나님의 은혜는 넘칩니다. 넘치는 것을 더 초월해서 풍성해지는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께서 쌓아 놓으신 곳이 은혜의 보좌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은혜를 빼면 남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은혜를 거두어 가면 우리는 시체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문닫을 시간이 다 되어서 허겁지겁 포도원에 들어가 한 시간 일하고 하루 일한 사람들처럼 일당을 받아 나온 품꾼과 비슷합니다. 몇 시간을 일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도 상관없습니다. 일등이냐, 꼴찌냐 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잘 생겼나, 못 생겼나 하는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인이 기분이 좋아서,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서 무조건 주시는 시혜가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은혜를 받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려고 은혜의 보좌를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곳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보좌를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나아간다'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입니다. 계속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계속적으로 우리는 그 보좌를 향해 나아가면 됩니다. 그럼 '나아간다'의 뜻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나아감의 종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은혜의 보좌는 어디 있습니까?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은혜의 보좌가 있습니다. 어디에 은혜의 보좌가 있습니까? 홀로 조용히 앉아 기도하는 밀실에 있습니다. 어디에 은혜의 보좌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모인 거룩한 성도들의 자리에, 이 예배 시간에 은혜의 보좌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은혜의 보좌도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완전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을 여는 그곳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풍성한 은혜가 쌓여 있는 보좌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 보좌로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빚진 사람처럼, 혹은 겁먹은 사람처럼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아갈 때는 당당하고 담대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들은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지성소는 절대로 보통 사람들이 못 들어가는 곳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만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대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일년에 한번만 들어오도록 허락했습니다. 그 명령을 어기고 들어가면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일년에 한번 들어갈 때도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대제사장도 부들부들 떨고 들어갑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지성소로 들어가기 때문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는 발목에다 긴 줄을 달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지성소 앞에는 휘장이라고 불리는 큰 커튼이 있어서 지성소를 가리고 있습니다. 다른 제사장들은 그 휘장 앞에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들어갑니다. 들어갈 때 발목에 줄을 달고 들어가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행여나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 자리에 들어갔다가 죽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들어간지 3시간이 되어도 안 나오고, 5시간이 되어도 안 나올 때 '무슨 일이 있나?'라면서 휘장을 걷고 들어갔다가는 다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사고가 나면 휘장 밖에서 줄을 잡아 당겨 대제사장을 꺼내기 위해 발목에 줄을 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당하게 나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잘나서 당당합니까? 누가 계시기 때문에 당당합니까? 완전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 철저하게 내 편이 되셔서 나를 도와 주시려는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그 분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고개를 들고 떳떳하게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설혹 죄를 범해 가슴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정을 가지고 당당하게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 제가 이런 일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면 주님이 두 말 하지 않고 용서하시고 놀라운 사죄의 은총을 허락해 주십니다. 담대하게 들어가십시오.


이렇게 들어가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제가 볼 때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내가 항상 받을 수 있는 은혜, 이것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하나님, 제 믿음이 너무 약합니다. 믿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믿음을 키워 주신다든지, '하나님, 대학입시를 봤습니다. 꼭 합격시켜 주십시오.'라며 열심히 기도했을 때 합격하게 해주셨다든지, 이와 같이 당장 급하기 때문에 주님 앞에 달라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기다리는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일컬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는 우리를 매우 기쁘게 합니다. 받으면 받은 대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이런 응답을 참 좋아합니다. 기도했는데 며칠이 안 되어 응답이 떨어지면 얼마나 신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만 대우해 주시면 이 세상을 천국으로 살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두번째 의미는 하나님 식대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식대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란 하나님만의 방법을 가지고, 하나님만의 때를 가지고 응답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하고 부르고, '예수님, 예수님 주십시오.'라고 애걸복걸해도 하나님의 방식에 맞지 아니하면 주시지 않습니다. 자기가 생각하시는 때가 아니면 절대 허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과 때를 따라서 주시는 은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위대한 인물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이 급하게 하나님께 달라고 구할 때 즉시 응답하시는 경우가 많은가, 가만히 두면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때를 맞추어서 주시는 때가 더 많은가 한번 조사해 보십시오. 어느 것이 더 많습니까? 후자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자주 봅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응답하시는 은혜가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라고 하면, 그것은 가끔 우리에게 몹시 큰 갈등과 고통을 안겨 줍니다. '하나님, 지금 당장 필요한데 왜 가만히 계십니까?' 한 달을 기도해도 일년을 기도해도 하나님은 가만히 입 다물고 계시는 것 같이 느껴질 때는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믿음이 마구 흔들리기도 합니다. 마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와서 '믿어도 소용없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다 쓸데없는 짓이다.'라며 계속 속삭여 댑니다. 이런 상황에 있으면 갈등이 일어나고 고통이 따라옵니다. 엄청난 인내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많이 경험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많이 경험하셔야 됩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기도할 때, 처음에는 내 식대로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소식이 없으면 이제 누구 식대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 식대로 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시간에 도무지 안 주시는군요. 그럼 이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대로 주십시오. 인내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기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면서 계속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면 어느 때인가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응답을 하실 것입니다. 그 응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더 엄청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응답이었을 때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이것은 나를 위해서 최선의 선물이다.'라고 믿어야 됩니다. 그렇게 믿고 고백하고 감사할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수준까지 가야 합니다. 어린애처럼 날마다 엄마 치마 자락을 붙들고 흔들어서 결국 무엇인가 얻어야 엄마에게서 떨어지는 애들처럼 살면 안됩니다. 처음에는 어린애처럼 하나님 옷자락을 잡고 흔들며 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도무지 대꾸를 안 하시면 그때부터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주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면 내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겠습니다.' 이런 수준까지 가야 됩니다.


사랑의교회에 재현이라는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인데도 믿음이 참 좋았습니다. 부모님들도 얼마나 예수를 잘 믿는지 모릅니다. 앞길이 창창한 나이이고 꿈을 가지고 지켜 볼 만한 인재입니다. 하나님도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저도 안달이 났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할 때도 나도 모르게 '하나님, 재현이를 고쳐주십시오. 고쳐 주셔야 됩니다.'라는 기도가 입에서 나왔고 저녁에 기도할 때도 나도 모르게 '하나님, 재현이를 고쳐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꼭 들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고쳐 주십시오. 그 가정의 친척들은 다 예수를 안 믿습니다. 그 가정만 예수를 믿고 있는데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 가정이 이런 시험을 당하면 큰 일 납니다. 하나님 영광을 가립니다. 꼭 고쳐 주십시오.' 아침이고 저녁이고 '하나님, 고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라면서 반년 동안을 기도했습니다. 한번은 병원에 가서 뼈만 남은 그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하나님이 불러 가셨습니다.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 되신 그분 앞에 그렇게 살려 달라고 애걸했는데도 하나님은 아무 대답도 안 하시고 있다가 그냥 불러 가셨습니다. 처음에는 제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랐습니다. 원망이 나올 정도로 답답했습니다. '하나님, 이러시면 제가 목회를 어떻게 합니까? 이토록 간절히 기도했으면 아무리 불치병이지만 들어 주셔야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불치병이라고 못 고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데려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한동안 제 가슴이 아리고 고통이 몰려오는데 아주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위로를 받은 것은 오히려 그 부모님 때문이었습니다. 그 부모님은 병원에서 아이를 몇 달 동안이나 간호하면서도 항상 얼굴이 평안했습니다. 의사나 간호원에게 전도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잘해 주실 것이라고 항상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부모님과 하나 남은 아들이 모여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다윗을 보고 배우자. 다윗이 자기 어린 아들이 병을 앓고 죽어갈 때 행여나 하나님이 고쳐 주실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금식을 하면서 잠을 자지 않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아이가 죽자마자 일어나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나님 앞에 가서 경배하고 돌아와서는 음식을 차려 놓고 먹었다고 했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는 식구들이 정말 그대로 했습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 있습니다. 수년 전에 '너희 중에 너희 자녀가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는 자가 어디 있고,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는 자가 어디 있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 주지 않느냐?'라는 본문으로 제가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구한 다음에 얻는 것은 모두가 떡이다. 내 눈에 볼 때는 돌처럼 보여도 절대 돌이 아니다. 나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도 나중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떡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간절히 기도하고 믿었는데 돌아오는 결과를 놓고는 그것을 돌로 보지말고 떡으로 보라.' 바로 이 부모님이 그것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내 아들의 죽은 것은 우리 눈에 보기에는 돌이다. 그러나 사실은 돌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떡이다.' 이렇게 두 부부가 서로 위로를 했다는 말을 제가 들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때를 따라 주시는 것으로 믿기에 비록 가슴을 찢어 놓는 슬픔이지만 이것은 반드시 떡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있습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기도하지만 응답이 없는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앞날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대제사장, 완전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도 은혜의 보좌에 계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것을, 가장 최선의 때에 맞추어서 주시려고 자기 앞에 담대히 나아 오라고 초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항상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절대 실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몰라줄 지 모르지만 우리는 절대 고독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화려하지 아니할 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늘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영광스러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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