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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성경공부

누가복음의 기독론; 섬기는 자로서의 예수

by 꿈꾸는 나무의자 2017.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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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의 기독론; 섬기는 자로서의 예수

Christology in Luke's Gospel: Jesus as One who Serves

김경진 (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1. 들어가는 말: 문제 제기

2. 새로운 기독론 접근의 가능성

3. 마가복음의 구속적 기독론

4. 누가복음의 사회구원적 기독론

5.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

6. 나가는 말: 全人的 구원론을 향한 제언

1. 들어가는 말: 문제 제기

복음서에서 기독론을 말할 때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 우선적으로, 각 복음서에서 예수님께 붙여진 칭호, 이를 테’(ku,rioj), ‘인자’(o` ui`o.j tou/ avnqrw,pou), ‘하나님의 아들’(o` ui`o.j tou/ qeou/), ‘그리스도’(Cristo,j), ‘선지자’(profh,thj), ‘다윗의 아들’(o` ui`o.j tou/ Daui,d) 등을 근거로 하여 어느 칭호가 더 많이 사용되었는가를 분석하여 설명하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다. 각 저자마다 선호하는 칭호가 다르고, 따라서 칭호의 선호도를 판단의 근거로 하여 기독론을 설명하는 것은 분명 일말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표현 및 묘사를 근거로 기독론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성령의 능력을 입은 종’, ‘모세와 같은 선지자’, ‘의로운 순교자등의 표현이 기독론 이해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방법이 병행되어 종합적으로 시도되기도 한다. 이밖에도 최근에 들어서는 누가복음의 기독론을 밝히기 위하여 그리스-로마세계로부터의 모형들과 구약성경에서 나온 모형들을 의지하는 방법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방법들은 다분히 역사적 예수에 초점을 맞춘 공관복음의 통일성에 의거한 시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복음서 저자의 신학을 중심으로 한 복음서의 다양성에 근거하여 기독론을 새롭게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 특별히 강조되어 나타나는 누가의 신학적 주제들을 누가신학의 기독론 이해에 접목하여 설명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누가신학의 기독론에 관해 새로운 논문을 써야할만한 타당성이 전적으로 수긍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기본 방향에 이제까지 누가복음의 기독론 이해에 크게 주목받지 못해 왔던 한 구절에 대한 연구를 추가함으로써, 본 논문의 필요성을 나름대로 제기하고자 한다. 그 문제의 구절은 누가복음 2227절이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 에 있노라.” (ti,j ga.r mei,zwn( o` avnakei,menoj h' o` diakonw/n ?ouvci. o` avnakei,menoj? evgw. de. evn me,sw| u`mw/n eivmi w`j o` diakonw/n)

 

내게 의아하게 여겨진 점은 이제까지 누가복음의 기독론을 거론하면서 학자들은 누가복음 2227절에 대하여 별로 주목하지 않아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구절은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신분 및 사역의 성격을 사도들에게 친히 설명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기독론 이해에 매우 중요한 단서임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누가복음의 기독론을 언급함에 있어서 별로 주목받지 못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누가복음의 다양성을 근거로 하여 누가신학의 기독론을 구명(究明)하되, 이제껏 누가복음의 기독론 이해에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던 본문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서두에서 분명하게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이 소논문이 누가신학의 기독론의 전모(全貌)를 밝힐만한 길이와 깊이는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의 목표는 단지 기존의 누가복음 기독론 이해에 있어 가려져있던 한 구석을 밝혀내어 한 가닥 새로운 요소를 덧붙일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하는 의도이다.

2. 새로운 기독론 접근의 가능성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이다(cf. 1.1). 따라서 복음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주제 중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주제는 다름 아닌 예수 이해, 즉 기독론이다. 일반적으로 기독론을 거론할 때면, 대개는 인간의 구원과 결부하여, 구원론적으로 그리고 대속(代贖)적 견지에서 이해한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당연한 것이다. 결국 기독교 자체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면 구원이 핵심이기에, 의당 이러한 견지에서 복음서 또한 읽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검토해 볼 때, 예수님의 죽음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전승 중 하나였는데, 바울이 이것을 잘 전수받아 그의 서신에서 밝히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일차적 사료(史料)로 볼 수 있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구원론적 견지에서 이해할만한 내용 및 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많지 않은 자료 가운데서, 그러나, 가장 주목할만한 근거는 바로 마가복음 1045(20.28)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kai. ga.r o` ui`o.j tou/ avnqrw,pou ouvk h=lqen diakonhqh/nai avlla. diakonh/sai kai. dou/nai th.n yuch.n auvtou/ lu,tron avnti. pollw/n). 물론 이 구절 중 대속물(lu,tron)에 대하여는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이 구절처럼 구체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예수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곳은 공관복음의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마가(마태)복음에서 예수님 사역의 구원론적 해석에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이 구절이 누가복음 2227절에서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물론 이 한 구절만을 갖고 누가의 예수님 이해, 즉 기독론을 총평가할 수 없기는 하지만, 마가(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차이는 우리로 하여금 누가의 기독론에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있음을 시사해준다. 왜 누가는 마가복음에 드러난 구원론적 의미를 약화시키고 있는 것일까? 혹은 다른 개념으로 대체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다른 해석의 동기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이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제 글을 시작함에 있어서, 복음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내가 수용하고 있는 몇 가지 방법론적 전제들을 언급하고자 하는데, 이는 차후에 혹 발생할 수 있는 불필요한 논의를 피하고자 하는 연유에서다. 첫째, 나는 마가복음 우선설(Markan Priority)을 전제로 한 편집비평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둘째, 나는 각 복음서가 궁극적으로 복음서의 배경이 되는 신앙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쓰인 글로 이해하며, 셋째, 복음서 기자들이 그 공동체 내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목회적 의도를 갖고 복음서를 기록하였다고 생각한다.

2. 마가복음의 구속적 기독론

이 글의 논의의 핵심이 되는 구절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누가복음 2227절이다. 이 핵심구절을 누가 신학적 관점에서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의 자료가 되는 마가복음과의 비교가 불가피하다고 판단된다(cf. 1.1-4). 그리하여 여기서는 이 구절의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045절을 마가 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거기서 드러난 결과를 누가복음과 비교하고자 한다.

마가복음 1045절은, 주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기 전, 주님의 세 번째 수난예언 이후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주님께 나아와 제기한 간청과 그로 인해 드러난 제자들의 세속적 욕망에 대한 책망의 결과로서 등장한다(참고, 10.32-45). 따라서 이 구절이 속해 있는 문맥에 의하면 힘과 권력이 득세하는 세속적 가치관과 상반되는 섬김의 도리가 주된 흐름으로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결론으로 소개된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섬김의 극치이자 절정(climax)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그 신학적 특징이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으로 알려져 있는 마가복음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보인다. 다시 말하면, 주후 64년 네로 황제에 의해 저질러진 대화재 사건의 범인으로 간주되어 로마 관헌으로부터 온갖 박해와 핍박을 당하고 있었던 마가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교훈을 전하기 위하여, 마가는 구주 예수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지상사역 동안 유대 관헌으로부터 온갖 박해와 핍박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었음을 알리고 있다. 특히 마가는 주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기사의 문맥 속에(8.22-10.52) 세 번에 걸친 수난예언을 삽입함으로써(8.31; 9.31; 10.33-34), 그 여행이 고난과 죽음으로의 여행임을 알리면서, 동시에 주님을 따르는 자들(제자들 및 마가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같은 길을 걸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문제의 1045절은 세 번에 걸친 수난예언이 끝난 후에 기록되었고, 동시에 마가복음의 제자도의 본론에 해당하는 중앙부분의 거의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는 문맥적 정황은(8.22-10.52), 마가가 이 구절을 그 공동체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제자도의 메시지의 핵심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전달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즉 마가복음의 제자도는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되,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좇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자도의 성격을 소개함에 있어서, 마가는 예수님을 제자도의 본보기로 제시하되, 특별히 그 죽음의 대속적 성격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구속론적 기독론의 성격을 아울러 바르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비단 제자도를 가르치는 선생일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을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구주(救主)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앞서 언급된 세 번의 수난예언들은(8.31; 9.31; 10.33-34)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죽음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는 구체적 언급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1045절에서 마가는 주님이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대속물로 죽는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구속론적 기독론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속적 죽음 모티프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다시금 반복되어 나타난다(14.24).

이상의 내용을 참작할 때, 마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은 핍박과 고난에 직면한 마가공동체를 위로 및 격려하기 위한 마가복음의 저술목적과 매우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사실은 마가공동체의 사회적 상황과 마가가 묘사하는 기독론과의 관련성을 확인시켜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요컨대, 마가공동체의 특별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하여 마가는 그 상황에 적합한 기독론 이미지를 묘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누가복음의 사회구원적 기독론

마가복음의 구원론적 기독론 모티프는 마가공동체와는 다른 사회적 상황에 놓인 누가공동체에게는 다른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누가복음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견해가 획일적이지 않은 까닭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임박한 종말이 연기된 상태에서 핍박이나 박해에 직면하고 있지 않은 상황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상이한 사회적 상황은 역시 예수님에 대한 누가의 이해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고, 문제의 구절인 2227절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기록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누가복음 2227절의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045절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 번째 수난예언이 언급되어 있는 문맥에서 그 결론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누가복음의 구절은 세 번째 수난예언과는(18.31-33) 전혀 다른 문맥, 즉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언급되어 있다. 한 마디로, 누가는 본문을 그리스도의 수난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상황에 배치하고 있고, 그 결과로 예수님이 자기 자신 및 자신의 신분을 소개하고 있는 이 독특한 구절은 마가(마태)복음과는 달리 구속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는 것이다.

물론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본문 하나만을 갖고, 누가복음의 기독론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음이 분명하다. 사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님은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22.19; tou/to, evstin to. sw/ma, mou to. u`pe.r u`mw/n dido,menon\)이라 했고, 자신의 피에 대하여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2.20; tou/to to. poth,rion h` kainh. diaqh,kh evn tw/| ai[mati, mou to. u`pe.r u`mw/n evkcunno,menon)이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이 말씀들은 마가복음의 병행구절들과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14.22; tou/to, evstin to. sw/ma, mou),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14.24; tou/to, evstin to. ai-ma, mou th/j diaqh,khj to. evkcunno,menon u`pe.r pollw/n).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한 내용이 이처럼 두 복음서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가가 마가의 전승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전수하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또한 누가가 마가복음의 구속적 기독론의 이미지를 일체 배제한 것이 아님을 뜻할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누가복음에도 마가복음에서처럼 구원론적 기독론의 모습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 발견되는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한다. 즉 누가는 마가복음의 구속적 기독론적 의미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 의미와 함께 좀더 발전되고 확장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새로운 의미의 부여는, 결국 마가복음의 배경이 되는 공동체와 누가복음의 배경이 되는 공동체의 상황(Sitz im Leben)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임박한 종말이 예상되지 않고, 직접적인 박해나 핍박이 수반되지 않는 그러한 상황에서의 기록론은, 임박한 종말과 핍박과 수난이 현실적인 문제로 당면해 있는 마가공동체의 상황에서 이해된 기독론과는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마가복음의 고난과 결부된 구속적 기독론보다는 공동체 내부의 삶, 즉 구성원들 사이의 윤리적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회 구원적(혹은 봉사적) 기독론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누가는 마가복음 1045절을 생략하고, 섬기는 자로서의 주님을 소개하는 것이다.

5.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

그러면 누가가 이처럼 마가복음의 구원론적 기독론에 사회구원적 기독론 의미를 추가적으로 부여한 동기와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히 누가가 속하였던, 그리고 그 대상으로 삼았던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특별히 강조된 주제들과 연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누가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에 대하여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누가복음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주지하는 대로, 누가복음은 특별히 부각되어 드러나는 여섯 가지 주제로 인하여 타 복음서들과 구별되고 있다; 보편주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 여인들의 향상된 지위, 부자들에 대한 비판, 재물문제와 연결된 구제 명령, 기도 및 성령에 대한 강조. 그런데 사실상 이 여섯 가지 주제 중 보편주의, 기도와 성령에 대한 강조를 제외한 나머지 주제들은 그 유사한 성격으로 인하여 크게 한 범주로 묶을 수도 있을 터인데, 그 핵심은 윤리적 특징이다. 이런 까닭에 지난 반세기 동안 누가복음 연구는 재물 및 빈부 문제에 집중되었던 것을 보게 된다.

앞서 우리는 누가공동체가 임박한 종말이나, 직접적인 핍박과 환난에 직면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삶의 윤리, 즉 사회 윤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부각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 종말이 임박하지 않은 현재의 상태가 지속된다는 전제 하에서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들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누가복음의 중요한 주제들인 재물, 빈부, 구제 문제는 이러한 윤리적 관심의 중요한 표현으로서, 누가복음의 사회 복음적(social gospel) 특징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관심은 마가(마태)복음의 구속적 기독론에 추가하여 사회구원적 기독론을 또한 강조하게끔 인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사회구원적 기독론은 일명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the Gospel for the Poor)이라고도 불리는 누가복음의 사회 윤리, 혹은 사회 복음적 성격과 결부되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이하에서는 사회구원적 기독론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누가복음이 품고 있는 사회복음적 성격을 설명함으로써 두 개념의 관계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으로서의 누가복음의 성격은 본격적인 형태로는 주님의 취임설교에서부터 시작된다(4.18-19).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到來)와 그것을 위한 준비로서 회개를 강조하고 있는 마가복음(1.15)과 마태복음(4.17)에 나타난 취임설교와 전혀 다른 내용이다. 취임설교에 나타난 이러한 메시아로서의 주님의 사역의 성격은, 그러나, 복음서의 서두에서부터 이미 예언된 바 있었으며(마리아의 찬가; 1.51-53), 이후에도 자주 반복되어 나타나면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6.20-22; 7.22; 14.13, 21. 특별히 151-53절을 제외하고, 앞에 소개된 각 구절에 가난한 자들이(oi` ptocoi,) 처음이나 혹은 마지막에 포함되어 있음은, 누가에게 가난한 자를 모든 불우하고 소외된 자들의 대표적 존재로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누가가 자주 소개하는 불우한 자들의 목록에 등장하는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문둥이, 병신, 저는 자 등은 자기 힘으로 일하여 생활할 수 없는 자들로서 사실상 거지요, 구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불우한 자들의 특징을 대표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고, 그밖에 다른 용어들은 가난한 자들의 구체적 실례로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가 특별히 이처럼 가난한 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앞서 언급된 불우한 자들은 그들의 신체적 결함 및 장애로 인하여 고대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사회, 종교, 경제, 문화적으로 소외를 당하였던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당대의 가정과 사회로부터 그 신체적 결함과 비천한 신분으로 인하여 철저하게 배척을 당하고 소외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누가는 이렇게 가정과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을, 그들의 성(), 혈통,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 종교적 정결함 등의 이유로 교회 역시 배척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포용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누가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시종일관 견지하며,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한 특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6. 나가는 말: 全人的 구원론을 향한 제언

이상에서 언급된 누가복음의 여러 특징들은 누가신학의 사회적 성격을 잘 나타내 보여준다. 누가의 소개에 따르면, 주님은 물론 영적으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려 왔지만, 또한 그와 아울러 당대의 소외된 자들, 즉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자들이요, 사회적으로는 눌린 자들을 그 가난과 속박의 굴레로부터 구원하려 왔던 것이다(cf. 19.10). 이처럼 두드러진 누가복음의 사회적 성격은 누가가 묘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도 반영되어, 마가복음에서 강조되어 나타난 구속적 기독론에 사회 구원적(봉사적) 기독론의 모습이 덧붙여져 소개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구원사적 기독론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구절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다. 누가는 기독론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에 나오는 익숙한 표현 대신에, 혹은 그것을 대체하여, 섬기는 자로서의 예수님의 이미지를 제고(提高)시킨다. 이러한 기독론의 사회적 이미지는 지금까지의 다소 제한적인 의미의 구속적 기독론으로 좁아진 기독론의 범위를 넓힘으로써 보다 포괄적인 보편주의적 기독론의 이미지로 바뀌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분명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선적으로는 인류를 죄와 그 결과인 죽음에서 구원하는 영적 구주로 오셨지만, 그 한 역할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주님이 지상사역 중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온갖 질병 치유 및 귀신 추방 사건에서 보듯이, 또한 인간의 육적 굴레와 속박으로부터 구원하는 육적 구주이기도한 것이다.

구속적 기독론은 주님의 초림의 궁극적 목적인 영혼 구원에 매우 적합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기독론을 제한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주님의 지상 사역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사와 기적 행위들을 참작할 때, 그리고 거기서 표현된 주님의 관심이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영()과 육()을 포함하는 인간의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기독론 역시 전인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이해될 필요가 있고, 그 때 추가되어야할 부분이 사회 구원적 기독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구원적 기독론을 매우 적절하게 제시하는 복음서가 바로 누가복음인 것이다.

거듭 주장하는 바이지만, 이러한 사회 구원적 기독론이 기존의 영혼 구원적 기독론을 대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상에 계시는 동안 행하신 주님의 모든 행적들을 고려할 때, 기독론을 영적 차원에서만 설명하는 것은 제한적이어서, 여기에 인간의 육적인 관심과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적 요소들을 추가함으로써, 전인적 구원의 의미로서의 기독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전제로 한 구속적 기독론에 덧붙이어 소개된 사회 구원적 기독론이라는 표현이 다소 생경하기는 하지만, 기독론의 의미를 보다 풍요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할 수 있는 개념으로 생각한다

누가의_예수_이해(김경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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