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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성경공부

모세오경 연구 [송제근 교수]

by 꿈꾸는 나무의자 2017.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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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오경연구-송제근 교수, 옮긴이: 정홍진

 

모세오경 전체는 대단히 유기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로 따로 떼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수미일관, 하나부터 끝까지 한 계획 속에 연속되어 있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경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토라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토라가 무엇이냐 얘기를 하면 토라하면 법, 그리고 생각나는 것이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토라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하면 토라가 생각나고 토라 하면 지겨운 것이 떠오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잘못 알고 있고 특히 토라에 대한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에 종교개혁가들이 성경해석의 빚을 누구에게 많이 졌냐하면 유대인들에게 많이 졌습니다. 그 이후에 성경해석가들은 토라를 무엇이냐하면 율법 또는 법으로 듣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토라가 율법 또는 법이냐 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토라라고 할 때 토라를 뭘 지키느냐 하면 모세의 법하고 모세 오경 전체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자세하게 오경 속에서 토라라는 용어가 어떻게 쓰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세 오경 가운데 토라라는 용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율법, 안지키면 죽는 법,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법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토라라는 용어를 보니까 오경 중에서 사경속에는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이 말이 사용된 내용도 아주 일반적으로, 피상적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지시사항, 규례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데 아주 특이한 것은 신명기에 나타나서는 이 토라라는 용어가 아주 집중적이고 조직적으로 쓰여졌고, 어떤 특정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라라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신명기에 있는 가장 중심영역에 있는 어떤 덩치 그것을 토라라고 한다는 것을 신명기 자체가 밝히고 있습니다.

 

신명기 4:44절에 토라라는 말이 한번 나오고, 그리고 난 다음 신명기 29장이후에 토라라는 용어가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그때는 이 토라라는 용어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시 형용사가 붙어서 나오는데 이 토라’ ‘저 토라’, ‘이 토라책이런 특수한 용어들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려보면 이 토라라는 것이 단순히 법이 아니라 신명기 속에 있는 어떤 중간의 커다란 덩치를 말하는데 다시 말하면 5-28장까지의 전체의 커다란 덩치를 말하는데, 이 중간의 커다란 덩치를 신명기 자체에서는 토라라는 용어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간에 있는 커다란 덩치 즉 5-28장까지에 있는 덩치의 내용이 무언가 하면 그게 바로 다름아닌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입니다.

 

그러면 토라는 무엇이냐 하면 언약의 책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24:7절을 찾아서 읽어봅시다. (24: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거기에 언약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언약의 책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출19장부터 24장까지 전체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맺은 시내산 언약 전체를 가리키는 언약 문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 용어가 뭐냐하면 우리가 신명기에서 본 토라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하면 언약의 책이라는 말은 시내산 언약을 가리키는 말이고 신명기에 나오는 토라라는 말은 신명기에 나오는 언약을 가르키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법하고 미국에 살고 있으면서 지키지 않으면 안될 법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통법을 지켜야 합니다. 세금도 법에따라 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의 법과 우리가 지켜야 하는 시민법과 별 차이를 모릅니다. 우리가 시민법 안지키면 벌금내듯이 마찬가지로 성경의 법도 안지키면 하나님께 매 맞는것 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법과 특별히 성경에 있는 언약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강원도 산골짜기의 때가 깨재재한 여자를 조선왕조의 왕후가 되기 위해서 초청을 한 것입니다. 초청을 했을 때 초청을 받은 여자가 때를 벗기고 얼굴을 하얗게하고 좋은 옷을 입고 전부 좋게 한 다음 임금님 앞에 딱 나서고 난 다음에, 그 후에 궁중의 법도와 예절을 지키는 것이 언약 전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의 더러운 것에서 구해내시고 그 구해내고 난 다음에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생각할 때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세상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사실,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깊이 인식되지 아니할 때 우리는 우리가 성경에서 가지고 있는 법을 아주 단순하게 안지키면 죽는, 매맞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법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런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아니할 때, 순종하지 아니할 때 매 맞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고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신 엄청난 특권 때문에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속에서 법을 강조하고 행동을 강조할때마다 가장 기본적으로 성도들 속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성도가운데 이해되지 아니할 때 법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이 힘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겹게 보이고 어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속에 이미 깊이 잠기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속에 생활할 때 목사님이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듣고, 그다음 까먹은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살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유대인들에게 토라를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단순히 지켜야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토라를 생각할 때 법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입니다. 언약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나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1조원을 주는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나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사실보다도 내가 현재 어떤 benefit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그것을 누리는가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엄청난 특권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토라라는 것은 법이 아니고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신약을 생각할 때 전체 큰 덩치가 두가지입니다. 복음서와 서신서입니다. 그래서 어떤때는 이것이 중요하기도 하고, 또 어떤때는 저것이 중요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복음서보다도 바울서신서가 더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그 엄청난 진리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 갈이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곳마다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는 것이 복음서입니다. 복음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믿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그 요소를 굉장이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특별히 복음서를 통해서 바리새인과 철저한 싸움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어떻게 현대에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에 바리새인은 없지만 바리새인과 유사한 사람들이 교회에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위선이라는 것은 얼마나 우리들 곁에 쉽게 다가오는지 아십니까? 성경말씀을 믿고 그것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속에 담겨있는 시커먼 위선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공격을 많이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교회와 개인속에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한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바로 복음서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이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 필요한 메시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속에 담겨있는 부정적인 메시지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때려부수는 이 메시지들은 엄청나게 신납니다.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시지요. 하지만 맨 마지막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 예수님은 도망을 가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찾으러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복음으로 그들에게 도전하십니다. “너희들이 떡을 먹고 배불러서 나를 찾아왔다. 생명의 떡인 나를 먹어라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키신 주님, 의도적으로 우리속에 있는 교만에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우리가 회개하든지, 아니면 지옥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결단하게 하는 복음서의 메시지는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신약속에는 바울의 서신과 복음서가 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속에 복음의 기본 메시지가 잃어졌을 때 사도바울 서신들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지나고 난 다음에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흐물흐물해지고 행동속에 복음의 진수가 나타나지 아니할 때 복음서를 통해서 사람들 속에 있는 어두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렇게 신약속에는 두가지가 다 골고루 중요한데 구약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구약은 세부분으로 나눌수 있는데 오경과 선지서와 시가서입니다. 선지서는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전선지서와 후선지서로 나누는데 전선지서는 소위 역사서, 후선지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지서를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은 오경, 역사서, 선지서, 시가서 이렇게 네부분으로 나눕니다. 이 네가지가 다 중요한 것 같으나 사실 중요도가 1, 2, 3, 4 혹은 a, b, c, d 이렇게 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기초가 없으면 그 위엣것이 이해될 수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밑에 것을 잘 이해해야 그 위엣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구약의 체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맨 먼저 이해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경입니다. 오경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 역사서도, 선지서도, 시가서도 잘못 이해하는 그런 결과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경이 얼마나 구약에서도 중요하고 기독교 신학에서도 중요한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경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것이 역사서입니다. , , ,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그런데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보면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아무것도 없는데서 출발해서 위로 올라가고 있고 사사기는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그런 발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의 전체 주제가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게 지켰고, 또 이스라엘은 얼마나 신실하게 지켜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특이한 것은 여호수아서 마지막장인 24장입니다. 24장은 승전을 축하하는 설교 메시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다 정복하고 난 다음에 승전을 기념하는 그 메시지가 굉장히 기분이 좋고 즐겁고 하는 메시지여야 할텐데 사실은 전혀 그런 메시지가 아니고 그 메시지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 대단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그렇습니다.

 

부정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도무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하리라 이 목이 곧은 백성들아아니 전쟁을 그렇게 잘해놓고 난 다음에 열두지파가 다 모여서 여호와께서 다시 언약을 맺으려고 하는데 여호수아가 하는 말이 이 사람들이 전쟁 잘했다고-여호수아는 일반 목회의 입장으로 봐서는 글러 먹은 사람입니다-맨 마지막 박수치면서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치 않고 전쟁을 실컷 다 하고 나니까 너희가 도무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하리라 이 목이 곧은 백성들아굉장히 부정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왜 부정적으로 얘기하고 있냐하면 그래도 이 사람들의 마음을 얽어매서 하나님의 언약에 굴복시키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호수아서 마지막장인 24장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난 다음 열두지파 동맹이 뭉치게 됩니다. 그러나 사사기 마지막에 보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열두지파 동맹이 깨지게 됩니다. 열두지파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그것이 깨져서 11:1로 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민족인 베냐민 지파가 완전히 없어질 정도로, 그 없어지는 그 사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사건 때문에 열한 족속이 한 족속에 대항해서 싸우게 됨으로 완전히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자체가 붕괴될 그런 위기까지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는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그 전체를 통해서 보면은 어떻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였거나 하지 못했거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얼마나 신실하셨는가라는 주제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룻기입니다. 룻기를 자세히 생각해보면 한 개인의 어떤 믿음과 신앙의 결단의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나은 차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차원이 뭐냐하면 사사기의 맨 마지막 시대를 생각해보면 소망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씨을 뿌려두셨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다윗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준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룻기가 있는 이유가 뭐냐하면 다윗이 준비된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없는 세대에 하나님께서 미리미리 꼭꼭 숨겨두어가지고 한 씨앗을 뿌려놓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사탄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작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도 정통 집안이 아니라 저 이방 모압땅에서 온 어떤 여자를 통해서 나온 그런 계통을 통해서.....그런데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길 원하시는 것이 뭐냐하면 바로 왕권입니다. 이 왕권이 수립되는 것과 동시에 삼상, 삼하 그 이하에 나타나는 것이 뭐냐하면 바로 선지자 직분이 수립됩니다. 그렇게 해서 맨처음에 만들어진 직분이 무어냐 하면 제사장 직분이고 그리고 지금 다윗의 왕권을 세우게 됨으로써 세우게 되는 왕직과 선지자직이 동시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 직분이 나타나서 하나님 나라를 섬겨가는 모습을 삼상, 삼하부터 왕상, 왕하까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상,하부터 왕상, 하까지 우리는 대부분 왕의 스토리로 읽기 쉽습니다. 왕이 어떻게 했더라, 왕이 어떻게 했더라.......그러나 거기에는 왕만 나타날뿐만 아니라 거기에 역할을 하고 있는 제사장과 그리고 선지자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섬겨갔던가 하는 그런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역사서 전체를 통해서 이미 오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떻게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경이 없으면 역사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경이 없으면 독일 신학자들이 이해하는 대로 삼상,하와 왕상,하를 왕직의 관점에서, 단순히 정치적인 하나의 집단이 형성되는 것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왕들을 철저히 부수어뜨립니다. 왕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왕직을 통해서 정치적인 이스라엘이 나타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왕이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미 모세 시대부터 하나님가 언약을 맺었던 이스라엘을 여러 다양한 직분들을 통하여 섬겨가고 만들어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경이 없으면 역사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다음 나오는 역사서는 대상, , , , 에 이런 책들이 있습니다. 이런 역사서도 역시 단순히 한 왕이 어떻고, 한 왕이 어떻게 잘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 그 직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과거에 영광의 약속을 주셨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대상하에 보면 선조들이 잘못한 것을 잘 얘기를 안합니다. 왜입니까? 이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매 맞을만큼 실컷 맞은 겁니다. 실컷 맞고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에게 이제는 너희 땅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하시는데도 이스라엘은 안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돌아간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도 모르고 이방백성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런 절망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쓴 메시지가 바로 역대상하의 메시지입니다.

 

삼상, 하와 왕상, 하의 메시지는 정 반대의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지 아니하고 타락해서 하나님께 얻어맞았는데도 왜 얻어맞았는지도 모르는 상황가운데서 쓰여진 것이 삼상하와 왕상하입니다. 그래서 왜 얻어맞았느냐? 하나님 앞에서 잘못해서 얻어맞았느니라 그래서 삼상하나 왕상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있는 그대로 다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상하에 보면 그러한 죄들이 그렇게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뭐가 많이 얘기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충성된 백성들에게 주시는 엄청나게 좋은 약속들, 그래서 다윗의 잘못과 솔로몬의 잘못이 언급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역대상하는 정직해야 될 역사 기록의 원리를 깨뜨린 것으로서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역대상하는 절망에 빠져있고 아무 소망, 희망도 없는 백성들에게 주신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맞고 매맞고, 지도자가 없어지고, 교회가 허물어지고 어중이 떠중이 흩어져 있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가, 그리고 주신 것 가운데 중요한 게 뭐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다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봉헌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다시 언약을 맺게하는 새로운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경 전체에서 얘기하고 있는 토라, 신명기가 요약하고 있는 토라를 단순히 법으로 생각하면 안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 자체입니다. 토라를 생각할때마다 벌벌떨리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분을 향해 내가 무언들 못드리겠는가 그런 차원에서 주신 하나님께서 주신 행동에 대한 권고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떨어지고, 목사님의 설교가 은혜가 안되고, 행동에 대한 요구가 지겹게 느껴질 때, 다시 하나님의 토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토라가 다른 것이 아니라 날 사랑하신 주님, 날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시고 당신의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 아버지, 그 사랑에 돌아가세요. 돌아갈 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렇지 아니할때는 법 자체를 생각할때는 지겹고 떨리고 목사님 오늘도 헌금 얘기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단순한 행동을 이야기 하시기 전에 행동 보다도 먼저 주신 하나님의 엄청나고도 무궁한 사랑, 그것 때문에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멸망하고 파멸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경은 시가서와도 관계가 됩니다. 구약 전체를 설명하면 사경(,,,)라는 큰 강 줄기들이 모아진 저수지가 신명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저수지에서 큰 파이프라인이 세 개가 나오는데 첫 번째가 역사서라고 볼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시가서, 세 번째는 선지서입니다.

 

시가서에 보면 시편1편에 주제가 복있는 사람인데 어떤자가 복있는 자입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그 율법이 바로 토라입니다. 토라를 단순히 율법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거하라, 저거하라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야기 하시냐하면 내가 너를 종되었던 애굽땅에서 구원하여 준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러한 행동을 하라 하시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처지가 원래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때가 깨재재 묻고 아무 볼품도 없는 그런 처녀였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지금 현재 내가 왕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 거대한 왕궁의 법도를 알고 살아갈 것인가 이런 차원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복있는 자는 여호와의 토라를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할 때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언약 책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행동의 요구 이러한 순서가 분명히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시편 1편은 아주 재미없는 시편으로 들려집니다. 유대인들은 아마 법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달달달 외우는 사람들 일겁니다. 시편 19편도 마찬 가지입니다. 시편 119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토라가 나의 등불을 밝힌다 이때 나오는 법들은 모두다 언약법을 가리킵니다. 단순하게 지켜야 될 법 그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속에 담겨져 있는 그 법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법은 이제부터 단순한 법이 아닌 언약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언약법이란 언약 때문에 만들어진 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시편속에 뭐가 나타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complain하는 게 나타납니다. 시편속에는 이렇게 불평의 시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대단히 점잖합니다. 그러나 시편에 나와있는 기도를 보면 점잖지 않습니다. 시편에 나와있는 기도를 보면 대단히 도전적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구워삶듯이, 설득하듯이 모든 요소를 다 동원해서 하나님이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듯이 하는 기도가 많습니다.

 

우리가 볼 때, 우리 장로님들이 하는 기도와 일반 다른 종교의 제사장들이 하는 기도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다른 종교에서도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일반종교에서는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신들의 노여움을 달래고, 신들에게서 은혜를 얻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그런게 아닙니다. 우리가 뭐 가지고 갈 게 있기 때문에 하는 기도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가 셀 수 없는 은혜가운데 우리를 선택, 혹은 점지하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자녀삼아주셨기 때문에 그 엄청난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해서 장로님들이 나가서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기도는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모든 종류의 용어를 다 사용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 씨름, 혹은 싸움하러 나가는 듯한 용어들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주시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 그리고 성도와 교회들이 처해있는 비참한 상황들을 리얼리스틱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를들면, 하나님 당신 종들의 시체를 보십시오.....피가 툭툭 떨어지는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파괴된 그 비참한 상황들을 들고 장로님들은 기도하십니까?

 

그렇게 처참한 상황들을 내놓고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을 단순히 신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즉 당신의 자녀로 삼은,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 기도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형식적이고, 그냥 일반종교의 제사장들이 하는 기도와 다른 것이 없는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결사적으로 하십시오. 왜 결사적으로 기도하지 못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 친 백성 삼아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준비해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때 맹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나게 좋은 것을 주셨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께 그것 달라고 구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떼쓰듯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 나와 있는 애절한 기도들, 시편의 1/2이상, 어쩌면 2/3이상이 애통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애통시를 보면서 믿음이 없는 자들의 기도, 재미없는 것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좋은 시편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시편 1, 복 이야기 하는 것, 그리고 시편 23.....그러한 시편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깊이가 있고 파워가 있는 시들은 어떤 시들이냐 하면 COMPLAIN한 시편, 즉 애통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애통시들은 어떻게 나온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의 기초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애통시에는 개인적인 애통시가 있고, 집단적인 애통시가 있습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이러한 애통시는 하나님과의 깊은 투쟁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살아계시지 않은지 안개가 태양과 나 사이에 가려져서 태양이 안보입니다. 빨리 좀 치워주십시오. 그런 실제적인 기도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입니다 라는 권리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선지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서에는 소선지서와 대선지서가 있습니다. 선지서의 구조는 정해졌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과거는 이스라엘의 죄, 현재는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받는 다는 것, 미래는 심판받고 난 후에 하나님이 은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구조를 선지자마다 가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구조가 어디에 있습니까? 심판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상하지 못한 긍정적인 미래, 열방에 너희가 흩어졌느냐 걱정하지 마라 내가 열방의 세상 끝에 흩어졌더라도 내가 다 모아 친백성 삼으리라 라는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약속들이 있습니까?

 

얼토당토않게 선지자들이 묵상하다가 이런 계시를 받았습니까? 이런 세 구조가 어디에 나와있는가 하니 바로 오경속에 나와 있습니다. 오경속에 내가 너희를 종되었던 애굽땅에서 구해내고 너희를 친백성 삼았는데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할 때, 신명기 28, 레위기 26장 이스라엘이 축복과 저주의 두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서 선지자들이 욕을 하고, 이놈의 자식들아....이사야서를 보십시오. 욕이 바로 튀어 나옵니다. 욕이 바로 튀어 나오면서 이스라엘을 꾸중하는 그 내용들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바로 오경 속에 나와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 저주의 내용이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의 언약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저주, 그래서 지금 당장 너희들이 해야할 것이 뭐냐 그것은 회개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회개에 대한 내용을 특별히 신명기 속에서 얼마나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명기 29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상하지도 못하게 부어주시는 돌아옴의 은혜, 그것이 신명기속에 또 나와있습니다. 30장에 나와있습니다. 선지서 속에 나타나는 과거, 현재, 미래 3요소는 이미 오경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31-34을 보겠습니다. 여기 표현된 대로 나의 법을, 나의 토라를, 나의 언약의 법을, 언약 자체를 그들의 마음속에 기록해서 그 결과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게 할 마지막 날....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법이 책에 기록되었는데 이제는 그날이 오면 내가 각 사람의 마음속에 심령속에 기록해서 담배피우던 자들이, 마약을 끊지 못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거기에서 떠나가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새 언약은 이러하니.....예레미야가 본 가장 중요한 환상은 새언약이 모세오경 속에 나와 있는 옛언약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변화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 36:26-28을 보겠습니다.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되리라이것이 언약관계에서의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의 역사를 뭐라고 하냐 하면 37:26을 보면 평화의 언약’ ‘화평의 언약입니다. 예레미야가 받았던 환상은 새언약이고 에스겔이 받았던 환상은 화평의 언약이란 말입니다. 이 새로운 차원의 언약은 이전의 언약에 대한 새로운 발전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발전이라 할지라도 변함이 없는 내용은 하나님의 토라, 언약, 언약법 자체입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땅 종되었던 곳에서 구하여 낸 여호와니라

 

이렇기 때문에 선지서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구조적 요인이나 신학적 주제나 전부다 오경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오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 성경귀절을 인용했습니다. 성경귀절 인용 3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신명기에 있습니다. 복음서에 있는 가장 중요한 개념들 그 전체가 사실은 구약에 의존하고 있고, 구약 속에서도 근본적으로 오경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신 그 나라, 땅과 씨에 대한 개념들, 천국이 하늘나라가 너희 가운데 임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 설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신 나라와 영역에 대한 관심, 이 관심은 철저히 오경적입니다. 오경의 전체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땅과 씨가 어떻게 마련되고 준비되고 확장되는가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서 속에서도 이러한 역사가 많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신서 속에서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관계, 오경속에 나타난 언약관계의 기초속에서 발전된 개념들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33편에서 말하고 있는 주제는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 그 속에 거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설교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도의 교제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죽어야 될 죽음을 이기신 그 생명을 바로 하나님의 공동체, 이스라엘 속에서만 기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영적인 교회속에 머물러 있어야만 거기에 구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교회와 보이는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속을 떠난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교되는 것은 구원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거스틴이 한 말이 이제는 우리가운데 의미가 있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섬기기 위해서 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형제들 사이에 거하지 않고 외톨이가 되어서 설교만 듣고서 쏙 빠져 나가고, 나는 사업이 바빠서 안돼, 나는 왔다가 가도 이걸로 충분해, 헌금 드린걸로 충분해, 요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자신이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구원을 내가 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1:12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나만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공동체 속에 있지 않고 외톨이가 되서 구원받겠지 하고 주일날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속에, 영적인 삶을 나누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은 떨어져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할 것인지를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 갈을 엄청나게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엡, 골을 강조해야 합니다. , 골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온갖 보화와 좋은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 속에 두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교회속에서 우리 역사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고 능력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20장에 나오는 예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이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오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오경을 생각할 때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고,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생각하고, 내가 받는 축복, 내 가정이 받는 축복으로만 생각한다면 성경을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받을 축복의 예표, 증거이고 그 준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오경 속에서 중요한 것이고 그 속에 하나님 나라의 진지한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1-11장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하면 곤두박질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계속 떨어지는, 가면 갈수록 타락하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씨라고는 아브라함 한 사람밖에는 남지 않은 비참한 역사, 그렇게 번성할 수 있는데도 타락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축소되어 결국 한 사람밖에 남지 않은, 그 한 사람이 창세기 마지막에서는 70명으로 하나님 나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전체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70명이 되었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7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이 완전 숫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숲을 보고 나무를 본다라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무 자체를, 꽃 몇 가지를 보는 것으로 만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숲 전체, 정원 전체의 지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면 여러분이 무엇을 감상하였고, 무엇을 못 보았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체로 가장 중요한 지도와 같은 내용이 무엇인가하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70명이 준비되는 것으로서 창세기는 마감됩니다.

 

출애굽기 맨 앞부분에 70명이 다시 나옵니다. 그리고 70명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씨로 준비되어 가는가 하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를 거치고 신명기에 가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는 땅이 마련되고 있는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자손과 땅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손이 없으면, 땅이 없으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있어서는 자손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자손이 안될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치 않으실 때, 저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저들을 죽여버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많은 축복으로 그들에게 땅을 엄청나게 주셨다 할지라도 저들이 또 타락할 때에는 저들을 여지없이 처벌해 버리시는 하나님, 오경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역사로서 어떻게 씨와 땅이 준비되는 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숫자로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숫자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싸움을 합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할지라도 일시에 그들을 쓸어버리시고 아무리 좋은 축복을 그들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일시에 저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빼앗아버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모습으로서의 언약을 말하겠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언약은 버리뜨입니다. 버리뜨는 인격적 당사자 사이의 공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겠다고 하는 약속이 아니라 니캉 내캉 어떤 관계로 가자가 버리뜨입니다. 결혼관계(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것), 입양하는 것(나는 지금부터 니 아버지고, 니는 지금부터 내 아들이다), 국가간 조약(지금부터 나는 니 주인이고 니는 나를 섬겨야 된다) 어떤 일정한 주체끼리의 관계를 맺는 것, 인격적 관계, 그 자체가 바로 버리뜨입니다.

 

물론 이 단어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해 준다라는 약속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버리뜨의 원래 의미인 관계설정의 의미에서 발전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버리뜨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조금은 신학적인 내용입니다만은 이 버리뜨라는 말은 종교개혁이후에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사용한 계약신학이라는 용어는 성경이 말하는 것과 조금 다른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버리뜨라는 단어가 실제 역사 가운데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K.A. 키친이 요약한 것을 가지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했던 생활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살았던 고센지방은 애굽의 북쪽지역에 있었고 가나안 접경지역에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가나안을 통한 통신 교역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당시에 애굽의 주요 상대국으로서 주전 12-15세기 헷제국(터어키지역)이 강성했습니다. 이 제국이 역사를 통해서 애굽과 자웅을 겨뤘습니다. 이 제국은 양 옆으로 많은 나라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약을 많이 맺고 있었고, 조약개념이 탁월하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애굽과 헷제국이 맺은 조약이 발견되고 있는데, 애굽에는 조약개념이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헷제국과 조약을 맺을 때 헷제국의 조약개념을 빌려서 애굽이 표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말로 된 조약에는 애굽에는 없는 말들이 사용되어졌는데 이것은 헷제국에서 차용한 말들입니다. 조약의 개념들을 만드는데 도사들이 바로 헷족속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북쪽에 살면서 헷족속의 조약개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미 알고 있는 조약개념을 사용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과 헷제국의 조약은 대등한 관계 또는 평등관계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도 크고 헷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조약은 약육강식 불평등관계에서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관계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종의 평행, 또는 유사, 아날로지로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증거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를 때 암 써굴라, 가장 보배로운 존재라는 단어를 쓰는데, 19:5, 14:2, 26:18에 쓰는데 이 용어가 불평등조약에서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 사이에서 조약이 만들어 질 때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향해서 부르던 조약의 전문용어입니다. 이로 보아서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써굴라라는 용어는 조약이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세상의 개념이 당신의 백성에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으므로 이 개념에 할례를 주어서 거룩하게 하셔서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 계시의 용어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임마누엘, 즉 인간의 용어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계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사의 시작으로서의,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버리뜨로서의 오경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경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서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22장 전체를 아브라함 개인적 믿음의 행동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으로 봐서는 전체가 보이지 않고 오해될 소지도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필요한 두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씨와 땅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과 지역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두 요소인 씨와 땅을 마련하시고 완성하여 가셨는가하는 그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창세기에는 씨와 땅에 대해서 버리뜨로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씨는 70명 창세기 마지막에서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땅은 재미있습니다. 땅이 무어로 준비되는가 하면 창12장에서 보면 아브람으로 하여금 갈대아 우르를 떠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사는 곳에 가서 이곳이 네 땅이다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글우글 살고 있는 전통과 유서가 깊은 워싱톤에 가서 이 땅이 니땅이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어째서 세겜땅이, 워싱톤이 내 땅이 될 것인가, 왜 죄악이 가득한 뉴욕이 내 땅이 될 것인가라고 우리가 의문을 할 수 있지만 아브람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아리러니 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땅이 니 땅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했는데 나중에 자기 마누라 죽었을 때 뭍을 땅이 없어서 돈을 주고 사게 됩니다.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하나님 약속을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왔는데 자기 마누라 죽어서 뭍을 땅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 약속이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자기가 산 땅에 뭍여 죽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어떻게 역전이 되었는가입니다. 가나안 땅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합니다. 아직까지 아모리족속의 땅이, 가나안 땅의 죄악이 관영하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참을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하지 아니하였는데, 만약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참을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하여 악이 위에 까지 올라가면 그때 이 나라를 완전히 쳐부수어 버리는데 다 쳐부수고 없애버릴 때에 가장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땅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이 땅을 돈주고 샀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 사람들만이 이땅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냥 이땅이 니 땅이다 하고 준 것이 아니라 돈 주고 사게하고 믿음으로 하는가 안하는가를 본 겁니다. 믿음으로 하게 한 후 그 땅을 주실줄로 믿고 갑니다 하고 아브라함은 죽었을 겁니다. 바로 그렇게 해서 그땅전체가 이 합법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의 땅이 되도록 만드신 겁니다. 아주 역설적입니다.

 

, 민 전반부에 보면 씨가 어떻게 준비되고, 완성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씨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진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버리뜨 관계를 정식으로 맺지 아니하면 (19, 24) 씨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출애굽기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라는 말을 쓰게 되면 출애굽한 사실만이 가장 중요한 사실같이 보이는데 사실 출애굽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이라는 것은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까지 가는 도중 길과 같습니다. 길을 걸어가서 목적지로 가게 됩니다. 그 목적지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 즉 버리뜨를 맺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라는 말을 들으면 출애굽기 전체의 내용을 출애굽하는 것이 전부인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라는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데 어떻게 바꾸어야 하냐 하면 시내산 언약기, 시내산 버리뜨기로 바꾸어야 합니다. 많은 해방신학자, 자유신학자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출애굽 그것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예해방, 흑인해방 시켜라 이것만 얘기합니다. 해방시키고 난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 해방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난 다음 돌아다니다가 있을곳이 없어서 다시 자기가 나온 곳으로 돌아와보니 깨끗하게 청소되어졌거늘 자기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적용해보면 병들어 하나님앞에 기도해서 병이 나았습니다. 마음이 슬 변합니다. 이전의 죄악된 생활로 슬 돌아갑니다. 나중 형편이 이전 형편보다 더 악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출애굽만 있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으로 아는데 도망나오고 난 다음에 무엇을 하느냐가 출애굽 전체를 통해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출애굽, 즉 도망이 목적이 아니고 무엇을 향한 도망이냐 무엇으로부터의 도망이 아니라 무엇을 향한 도망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를 시내산 언약기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출25, 27장에 보면 이 씨가 어떻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씨로 머물 수 있는가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에 보면 인구 센서스를 두 번이나 합니다. 아니 왜 두 번합니까? 한번 딱 하고 나니까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가나안 땅에 올라가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는데 그걸 안믿고 그냥 벌벌벌 떨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와서 하나님을 믿자, 우리는 정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돌로 칠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다 진멸하리라 그래서 20세 이상은 사막에서 다 엎드러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제2세대가 나와서 제2세대를 향해서 인구 센서스 한 번 더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무리 많고 잘 된다하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께서는 졸지에 순식간에 제거해 버리십니다. 그리고 인구센서스를 다시 하십니다. 아무리 위대한 역사를 초기에 만들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해서 하지 아니할 때 그 역사를 불도저로 허물어 버리시고 새 역사를 제2세대를 통해서 하십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두 번의 인구조사는 그 씨가 아무리 많고 하나님과 합법적인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어떻게 현재의 완전한 순종을 하나님 앞에 하는가 하는 깊은 진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민수기 후반부와 신명기에서 그 땅이 어떻게 준비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후반부 갑자기 미리 계획에 들지 않은 요단 동편 땅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도피성이 세워졌습니다. 이 도피성이 세워진 땅은 하나님의 영적인 통치가 각 지역마다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주어질 더욱 완전한 땅이 요단 서편의 땅에 대한 약속의 징표이자 소망 가운데 인내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경륜입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그땅에 들어갈 것을 전제하고 거기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미리미리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씨의 경우에서 마찬가지로 땅이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영원히 살수 없는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그것이 주어졌지만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아니할 경우에 나 역시 이전에 이땅에 살았다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심판을 받았던 가나안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이땅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동주의 없습니다. 따놓은 구원의 당상은 없습니다.

 

오경을 하나님 나라의 역사서로 보면 세가지 관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과거,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광야 여행중에, 지금 현재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고, 신명기는 미래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래는 열려져 있는 미래입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고, 굉장히 엄숙한 경고가 담겨 있는 미래입니다. 어떤 경고입니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리라. 하나님 앞에 심판이 예배되어 있다는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경고하셨습니다. 말세에 내가 믿는 자들을 보겠느냐? 아주 유사합니다.

 

이제 오경전체는 시간의 개념에 철저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개인적으로 전체적으로 과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시간의 삼차원의 개념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오경전체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오경전체를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오경의 주제로서의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버리뜨는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땅과 씨의 두 요소를 마련하여 나가는 전 과정이 바로 버리뜨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경에서는 가장 중요한 두 버리뜨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부터 24장까지 마련된 시내산 버리뜨이고, 신명기에 나타난 모압 혹은 세겜버리뜨입니다. 창세기에서 족장에게 주신 버리뜨는 일종의 참된 버리뜨에 대한 준비과정 혹은 서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족장에게 주신 버리뜨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버리뜨를 세운다는 말이 나오는데, 뭐에 대한 버리뜨냐하면 바로 땅에 대한 버리뜨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기다리나니 관영했다하면 밀어붙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땅이 네 땅이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에서는 씨에 대한 버리뜨가 나오고 있습니다. 네 씨가 셀 수 없이 되리라. 네 이름을 아브라함이라하라, 네 아내의 이름을 사라라 하라고 두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은 땅에 대한 이야기로, 창세기 17장은 씨에 대한 이야기로 이미 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씨와 땅에 대한 약속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시내산 버리뜨이고 모압 버리뜨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있는 버리뜨의 원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내산 버리뜨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첫 버리뜨, 처녀 버리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처음으로 본격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로 땅보다도 씨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땅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씨가 어떻게 준비 잘 될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에 나타난 모압 혹은 세겜 버리뜨는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던 버리뜨의 갱신, 혹은 버리뜨를 새롭게 하는 것, 언약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언약의 갱신은 대상이 바뀌거나 상황이 바뀌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뀐 상황이 무엇인가 하니까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태까지는 그 땅에 못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요단강 동편의 땅이 주어졌지만 그것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그 땅은 덤으로 얻은 땅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 믿고 나서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얻은 삶은 덤으로 얻은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삶이 천국에 있잖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요단 동편에 살고 있는 삶을 진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삶은 덤으로 얻은 삶입니다. 여기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 신명기의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신명기의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주어질 하늘나라 땅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요단강 동편이 뭐가 좋습니까? 요단강 서편으로 건너가야지요. 오늘날 우리가 요단강 서편을 건너갈 자세를 신명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상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 제1세대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제1세대는 출애굽해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버리뜨를 맺은 세대입니다. 그 세대들은 어떻게 되었지요? 사막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 다음 제2세대가 일어났습니다. 그 제2세대가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어야 합니다. 이 세대가 하나님과 버리뜨를 맺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신명기에 나오는 두 번째 모압 또는 세겜 언약은 미완성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와있는 현재 모압에서, 요단강 동편에서 모세에 의해서 준비되어지지만 장차 장래에 세겜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여호수아에 의해서 완성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완성 교향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요단 동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근신하면서 살 것인가를 신명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의 차원이 오경 마지막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면서, 그 좋은 땅을 바라보면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경전체를 통해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하나님이 나와 언약, 개인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 이스라엘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밖에 나와 있으면 영적으로 죽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영적인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죽어도, 살아도 교회 안에 들어가서 죽고 살고 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찌지고 볶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경 전체를 요약하는 신명기는 일종의 토라라고 신명기 자체가 요약하고 토라는 율법이 아니고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미리 우리와 관계를 만드셨고, 여셨고, 지금도 초청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그 관계의 법을 지키고 있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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